<우리지역 문화탐방> 수월정(水月亭)의 전설
<우리지역 문화탐방> 수월정(水月亭)의 전설
  • 광양뉴스
  • 승인 2016.04.15 21:07
  • 호수 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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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강항 선생의 청년시절 조명
조동래 시인·수필가

선조 28년(1594) 성혼(成渾)의 문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동인의 탄핵을 받았으나 교서관에 분관된 후 고서관 박사가 되었다. 이후 성균관 전적이 되었고 그해 겨울 공조좌랑을 거쳐 31세 때 형조좌랑이 되어 봄이 되자 휴가를 얻어 귀향근하고 있었다. 정유재란으로 위급한 상황이 되자 이광정의 종사관이 되어 군량을 모집 하다가 남원이 함락되자 영광으로 돌아갔다.

정유재란은  임진왜란이 승리 없이 소강상태로 이어지고 있게 되자 일본과 명나라는 화친을 운운하며 밀고 당기고 있었다. 그 사이 왜적은 포항에서 순천 해룡 사이에 왜교 성을 축조하고 임진왜란 때 정복하지 못한 전라도를 점령하려 시도했던 것이다.

왜군은 군량미 확보를 도모할 심산으로 5만6천여 군사를 동원해 부산앞바다에서 남해를 거처 전라지역(하동, 남원)으로 밀고 올라가는 재침(丁酉再亂)을 도모 했던 것이다. 이때 남원에서는 3천여 명의 관군이 항전했으나 3일 만에 패퇴하니 성안에 있던 민가는 17가구뿐이었다.

그로인해 1만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인근 지역으로 나가서 살인은 물론 향교ㆍ사찰 등 문화재에 방화와 약탈 등 분탕질을 쳐 그 피해는 말로 형언할 수 없다. 이곳에는 지금까지 만인의 의총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선생은 고향집에 머물다가 왜군의 침략소식을 듣고 남원으로 향하여 패전을 확인하고 서해로 탈출을 기도했다. 출발에 앞서 김상준과 함께 격문을 띄워 의병 수백 명을 모았지만 왜군의 기세에 놀라 바로 흩어졌고, 영광지역도 왜군에 의해 유린당했다.

이때 강항은 배 두 척을 구해 식량을 싣고 집안 식솔을 배에 태워 통제사로 임명된 이순신 진영으로 향했지만 영광 염산의 논잠포 부근에서 왜군의 군선에 의해 생포되고 말았다. 선생은 물에 뛰어 들어 자살을 기도했지만 연안바다의 물이 얕아 왜군의 수병에게 건져짐으로서 실패한 후 순천 앞바다를 지날 즈음 다시 자살을 기도했으나 또 실패하고 말았다.

가족과 승선했던 사람들은 선생이 보는 앞에서 그들의 칼에 죽고 바다에 던져 짐으로 많은 목숨이 희생되었다. 강항선생이 승선한 배는 여수와 부산 앞바다를 거쳐 일본의 시코쿠(四國)지방 이요(伊豫)의 오즈(大洲)성으로 끌려갔다.

강항을 사로잡은 장수가 오즈 성주 사도(佐渡)의 부하 노부시치로(信七郞)였던 것이다. 당시 일본 수군을 지휘한 장군이자 사도의 상관은 남원성 전투에도 참가하고 명량대첩에서 이순신 장군에게 패한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였다.

그들이 강항 선생을 처형하지 않은 것은 조선의 학식 높은 선비·문화재·보물 등은 가치를 인정하고 본토로 유출 및 유인했던 것이다.

강항은 선비로 인정을 받아 오즈성에서 한양(漢陽)을 방문한 적이 있다는 슈세키지(出石寺)의 승려 요시히도(好仁)와 친교를 맺기도 하고, 탈출을 시도하다가 붙잡히기도 했으나 비호하는 자들이 있어 생명을 부지했다.

선생은 1598년 6월 오사카를 거쳐 교토의 후시미(伏見)성으로 이송되었고 이곳에서 도 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곳에 온지 1년 8개월 후인 1600년 5월에 풀려나 남은 식솔과 함께 귀국길에 올랐다.

당시 일본은 조선의 문화와 예술을 탐하여 서적·목판 활자본·공예품 등 문화재를 약탈하는데 혈안이었다. 그리고 왜군의 포로가 되어 압송된 조선인의 수만도 10만 명에 달했는데, 그들의 대부분은 도공이나 공예 기술자였으며 이것은 조선의 선진기술을 약탈하기 위함이었다. 오오즈성 킨잔 슛세기 사에는 400년 전 일본에 포로로 끌려왔던 강항과 인연이 깊은 곳이다. 절 입구에 조선의 종 하나가 걸려 있는데 이것은 선생이 일본으로 끌려올 때 함께 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곳에서 강항은 킨잔의 제5대 지주인 카이케이를 만나 한시(漢詩)를 주고받으며 친분을 쌓았는데 그가 국가 기밀인 일본의 전국 지도를 강항에게 보여주기도 했다. 간양록(看羊錄:姜沆著)에 의하면 당시 일본 사회는 무예를 중시하는 분위기였다.<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