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은 계속되어야만 한다. 젊고 사랑받았으므로
봄은 계속되어야만 한다. 젊고 사랑받았으므로
  • 광양뉴스
  • 승인 2016.04.29 20:02
  • 호수 66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지훈 순천대학교 학생지원과 조교
이지훈 순천대학교 학생지원과 조교

“지훈이는 선시를 써 보는게 어떠냐”

문학을 전공했던 대학 졸업반 졸업작품 심사를 받으러 매일 같이 지도교수님 작업실을 드나들던 나에게 졸업작품 통과 도장을 찍어주신 날 건네신 고 송수권 시인의 말씀이었다. 그렇게 그것으로 교수님은 내가 기억하는 마지막 모습이 되었다. 후회는 언제나 아무리 빠르더라도 이미 그땐 늦는 법. 또 그렇게 미루던 일들로 인한 후회가 밀려왔다.

지난 4일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서정 시인이셨던 송수권 시인께서는 산문에 기대어 산다화 한가지 꺾어서 누이 곁으로 떠나셨다.
 아직 많은 날들을 살지 않아 초연한 것인지 모르겠으나, 언젠가 겪어야 할 어떻게 이별해야 대처하는 방법과 떠나는 모습을 봄에게서 배운다. 사람이 태어나 살다가 떠나가는 것은, 마치 봄날 한껏 꽃이 피었다가 지는 것과 같음을 여러 시인과 소설가들은 말했다. 그 중 낙화를 묘사한 김훈의 글을 소개한다. 

“동백꽃은 해안선을 가득 메우고도 군집으로서의 현란한 힘을 이루지 않는다. 동백은 한 송이의 개별자로서 제각기 피어나고, 제각기 떨어진다. 동백은 떨어져 죽을 때 주접스런 꼴을 보이지 않는다. 절정에 도달한 그 꽃은, 마치 백제가 무너지듯이, 절정에서 문득 추락해 버린다. ‘눈물처럼 후드득’떨어져버린다.

매화는 질 때, 꽃송이가 떨어지지 않고 꽃잎 한 개 한 개가 낱낱이 바람에 날려 산화(散華)한다.
매화는 바람에 불려가서 소멸하는 시간의 모습으로 꽃보라가 되어 사라진다. 가지에서 떨어져서 땅에 닿는 동안, 바람에 흩날리는 그 잠시 동안이 매화의 절정이고, 매화의 죽음은 풍장이다. 배꽃과 복사꽃과 벚꽃이 다 이와 같다.

 선암산 뒷산에는 산수유가 피었다. 산수유는 다만 어른거리는 꽃의 그림자로서 피어난다. 그러나 이 그림자 속에는 빛이 가득하다.
빛은 이 그림자 속에 오글오글 모여서 들끓는다. 산수유는 존재로서의 중량감이 전혀 없다. 꽃송이는 보이지 않고, 꽃의 어렴풋한 기운만 파스텔처럼 산야에 번져 있다. 산수유가 언제 지는 것인지는 눈치채기 어렵다.

그 그림자 같은 꽃은 다른 모든 꽃들이 피어나기 전에, 노을이 스러지듯이 문득 종적을 감춘다. 그 꽃이 스러지는 모습은 나무가 지우개로 저 자신을 지우는 것과 같다. 그래서 산수유는 꽃이 아니라 나무가 꾸는 꿈처럼 보인다.

산수유가 사라지면 목련이 핀다. 목련은 등불을 켜듯이 피어난다. 꽃잎을 아직 오므리고 있을 때가 목련의 절정이다. 목련은 자의식에 가득 차 있다. 그 꽃은 존재의 중량감을 과시하면서 한사코 하늘을 향해 봉우리를 치켜올린다. 꽃이 질 때, 목련은 세상의 꽃 중에서 가장 남루하고 가장 참혹하다.

누렇게 말라 비틀어진 꽃잎은 누더기가 되어 나뭇가지에서 너덜거리다가 바람에 날려 땅바닥에 떨어진다. 목련꽃은 냉큼 죽지 않고 한꺼번에 통째로 뚝 떨어지지도 않는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채, 꽃잎 조각들은 저마다의 생로병사를 끝까지 치러낸다. 목련꽃의 죽음은 느리고도 무겁다.

천천히 진행되는 말기 암 환자처럼, 그 꽃은 죽음이 요구하는 모든 고통을 다 바치고 나서야 비로소 떨어진다. 펄썩, 소리를 내면서 무겁게 떨어진다. 그 무거운 소리로 목련은 살아 있는 동안의 중량감을 마감한다. 봄의 꽃들은 바람이 데려가거나 흙이 데려간다. 가벼운 꽃은 가볍게 죽고 무거운 꽃은 무겁게 죽는데, 목련이 지고 나면 봄은 다 간 것이다.“

- 김훈 <자전거 여행> 중에서 -

이 글에서‘낙화’로부터 무슨 노골적인 유추나 교훈을 끌어내는 것도 어색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또 이 글을‘낙화’에 관한 단순한 관찰과 소묘로만 읽는 것도 부적절한 처사가 될 것이다. 모호할 정도로 교묘하게 이 글은 삶의 연장 끝에 놓인 죽음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을까 하는 것은 둘이 아니라 하나의 문제인 것이다. 인간 군상의 삶이 다양한 만큼 저마다 살다 가는 길도 제각각이겠지만, 삶이 죽음을 이미 규정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렇게 피어난 꽃은 이렇게 지고, 저렇게 피어난 꽃은 저렇게 진다. 동백꽃처럼, 매화처럼, 산수유처럼, 목련처럼 살다 죽는 것, 그것을 바라보고 평가하는 것은 각자의 몫.

다 아름답고 소중해 보이긴 하지만 그중에서도 당신은 어떤 꽃의 삶과 죽음이 맘에 와 닿는가?

김훈의 문장을 위와 같이 해석한 ‘시를 잊은 그대에게’에서 정재찬 교수는 ‘목련의 자의식, 그 존재의 중량감이 돋보이는 터다. 목련의 낙화를 일컬어 가장 남루하고 참혹하다고 했지만, 알고 보면 그것은 한사코 하늘을 향해 봉우리를 추켜올리며 산 대가이기도 하다. 냉큼 죽지 않는 것도 미련을 떨어서가 아니라, 죽음이 요구하는 모든 고통을 다 바치는 생에 대한 외경과 성실 탓이다. 느린 대신 무겁다.

아니, 무겁기 때문에 느릴 뿐이다.’ 라고 나이가 들어 갈수록 목련 쪽으로 기운다고 했다.
우리가 사는 동안은 언제나 봄 일 것이다. 베라 브리튼은 청춘의 증언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봄이 영원히 계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젊고 사랑받았으므로… 그리고 그 때는 5월 이었다.’

* 송수권 시인

1940년 전남 고흥에서 태어난 고인은 1975년 문학사상에서 시 산문에 기대어로 신인상을 받으면서 등단했고, 소월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김영랑문학상 등 주요 시문학상을 수상하며 한국 전통 서정시의 계보를 이었다. 그는 남도 특유의 역동적이면서 애틋한 세계관과 향토적 언어로 전후 한국 서정시에서 도드라진 허무주의를 극복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송수권 시인은 순천사범학교와 서라벌 예술대를 졸업하여 순천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및 명예교수로 재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