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지역 문화탐방| 수월정(水月亭)의 전설<15>수월정과 수월정유허비
|우리지역 문화탐방| 수월정(水月亭)의 전설<15>수월정과 수월정유허비
  • 광양뉴스
  • 승인 2016.05.20 20:34
  • 호수 6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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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래 시인ㆍ 수필가
조동래 시인ㆍ 수필가

수월정과 수월정유허비 내용을 찾다보면 불랙홀을 들여다보는 기분이다. 설립년도와 인과관계가 조합되지 않기 때문이다. 수월정은 나주 목사를 역임한 정설이 말년을 보내기 위해 선대(父)께서 생활하고 있던 섬진강변에 정착하면서 수월정을 건립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의 아버지 정인관은 별시문과에 합격했으나 방목에도 생몰(生歿)년대가 불분명하다. 다만 출사해 벼슬은 전적(典籍 : 조선시대 성균관의 정6품 관직)ㆍ영천ㆍ보성군수와 장흥부사 등을 역임했다고 하나 언제 광양에서 살았는지의 기록은 전혀 찾을 길이 없다.


인관과 아들 정설의 프로필은 한국 인물백과사전·두산백과 외 어떤 곳에도 찾을 수가 없으니 깊은 늪으로 빨려 들어간다. 수월정기문이 송강집과 수은집에 상재되어 있다. 묘한 것은 그 내용이 거의 비슷하니 어느 것이 먼저 쓰여 졌는지는 물론 어떻게 해서 두 문집에 등재되었는지도 연구과제이다. 
 

송강 정철(松江 鄭澈) 작이라 알려진 수월정유허비(水月亭遺墟碑)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사대부가 벼슬길로 나가 세상에서 더 이상 쓰임이 없으면 자신의 지위를 버리고 시골에서 묻히게 되는데 그런 사람들은 반드시 이름난 산과 아름다운 물이 있는 곳을 골라서 집을 짓고 자연의 즐거움을 누린다.

한 편으로는 맑고 한가하며 고요한 즐거움을 누리고 또 한편으로는 시국을 근심하고, 임금을 그리는 정을 드러낸다. 구양수(歐陽修)가 영산에 있었던 것과 두기(杜祈)선생이 휴양에 있었던 것이 모두 이와 같다. 전 나주목사로 본관이 광산인 정 현감은 나이 50에 세상에서 버려졌다.
 

선 대부 옥천선생(父:玉川先生)의 별서가 있던 광양에 자리를 잡았는데 조상의 여막과 40리 떨어져 있었다. 경치 좋은 곳을 골라 정자를 세우고 수월이라고 이름 하였다.


내가 남쪽의 산들을 쭉 살펴보니 우뚝하고 높은 산들이 수천이나 되었는데 백운산이 가장 기이하였다. 남쪽의 강으로 배를 띄울 수 있는 곳 역시 수천이나 되었었는데, 섬진강이 가장 컸다. 백운산의 동쪽 능선을 정자의 지붕으로 삼고 섬진강의 상류를 정자의 아래에 두었으니 경치의 빼어남은 논할 필요가 없다.
 

하물며 천하의 삼신산(三神山)가운데 하나인 방장산(方丈山:지리산)의 한 줄기에 살면서 불을 때서 밥을 지어먹으며 이 세상에 사는 인간으로써 이 산의 이름을 들은 사람 역시 드물다. 여기서 살면서 음식을 해먹고 아침저녁으로 마주 대하는 즐거움은 어떠하겠는가? 왼쪽은 호남이고 오른쪽은 영남이라 섬과 산봉우리를 껴안았네.
 

오고가는 배, 구름은 날듯이 가고 새는 깃드네. 나루터를 낀 들판은 텅 비어있고 고기떼는 모여드네, 위천(渭川:황하로 흐르는 강) 넓은 땅에 대나무요 업수가의 붉은 꽃이라 학동(鶴洞)의 아침 아지랑이요, 악양(岳陽)의 저녁노을이라, 철쭉꽃이 산을 이루고 불타는 구름이 봉우리를 만드네, 서리 내리니 온갖 나무들 모두 붉고, 얼음 언 긴 강이 하얗다네, 천태만상이 모두 발아래 모여드니 수월정이 선택받은 명승지가 되는 까닭이다.


10년의 전쟁이면 문물이 모두 비게 되는데도 수월은 옛날과 같다. 세월이 지날수록 풍속은 나빠지고 사람들의 인심은 옛날과 다른데도 수월은 오히려 예전과 같다. 고루한 것은 버리고 예쁜 것에 모여드는 세태 따라 문전이 적막하니 수월은 멀지 않다.


세월 따라 가는 것은 모두 이와 같으나 수월은 간적이 없고 차면 비워지는 것이 저와 같으니 수월은 끝내 사라지거나 자라남이 없다. 달빛에 물결은 금빛으로 일렁이고 고요한 달그림자는 푸른 물결에 잠긴다. 물은 달을 얻어 더욱 맑아지고, 달은 물을 얻어 더욱 희여 진다. 이는 바로 정 현감의 가슴이 맑고 투명한 것과 같으니 수월이라고 이름 지은 까닭이다.
 

내가 비록 정 현감이 올랐던 그 정자에 오르지는 못하지만 정 현감이 지은 시가를 읊고 정 현감이 남긴 글을 보니 성글게나마 수월이 가진 의미에서 만분의 일이라도 알고 정 현감의 마음을 헤아리게 되었다면 나는 진실로 알게 되는 것임으로 이렇게 쓴다. {위의 글은 1925년 발간 광양군지 수월정기비문 번역본을 移記한 내용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