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지역 문화탐방| 수월정과 수월정유허비<끝> 수월정은 언제 건립되었는가
우리지역 문화탐방| 수월정과 수월정유허비<끝> 수월정은 언제 건립되었는가
  • 광양뉴스
  • 승인 2016.06.10 21:09
  • 호수 6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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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래 시인•수필가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수월정의 개요에 의하면 ‘鄭渫 이 말년을 보낸 곳으로…’ 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광주정씨 족보(世譜ㆍ家譜)에 의하면 정설의 아버지 정인관(鄭仁寬)의 자는 백유요 호는 옥천(玉川)이다. 1549년(명종4) 진사시에 합격하고 라는 기록하고 있으나 이것은 오류인 듯하다.

사마방목에 의하면, 중종 37년(癸卯,1543) 진사시에 합격하고, 방목에는 1552년(명종 7)에 문과에 급제한 후 예문관 검열ㆍ대교ㆍ홍문관 수찬ㆍ교리ㆍ응교, 사헌부 지평ㆍ장령, 병조정랑, 무장현감, 그리고 전라도 도사를 재차 역임하였다. 이후에 장흥과 밀양의 부사를 거쳐 직제학ㆍ부제학ㆍ이조참의를 지냈다. 이퇴계 기고봉과 도의로 교유하였으며, 남도의 선비들 중에 그를 따라 배우는 자들이 날마다 집안에 가득했다. 배우자는 해미곽씨와 남원양씨인데, 남원양씨의 부친은 병사 양우춘이다. 묘소는 왕산동 동막치에 있고 좌향은 유좌이다. 15세손 감우가 유사를 지었고, 승지 김복한이 묘갈의 음기를 지었다.

4남 1녀를 두었는데, 네 아들은 융(瀜)ㆍ약ㆍ설(渫)ㆍ란(瀾)이다. 이 기록을 보면 출생과 사망 날자가 없으나 방목에는 인관의 출생일은 1493년으로 돼 있고 사망일이 없다. 그러하니 수월정과 수월정유허비를 언제 누가 건립했는지를 정리하는데 장애가 된다. 

또한 정인관이 언제 광양으로 왔는지의 근거는 찾을 길이 없다. 인관은 아주 늦게 진사에 합격했고 등과는 명종 7년(1552)이므로 59세 때 인 것이다. 그리고 광양으로 옮긴 것은 벼슬(예문관 검열ㆍ대교ㆍ홍문관 수찬ㆍ교리ㆍ응교ㆍ사헌부 지평ㆍ장령, 병조정랑, 무장현감, 그리고 전라도 도사를 재차 역임)이 끝나고 왔다면  칠순 후반기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한 곳의 임기를 1~2년으로 보면 열다섯 곳이니 출사기간을 20년으로 헤아려 볼 수 있다. 1573년에 비를 세웠으니 수월정은 그 이전에 건립된 것이다. 수월정을 건립한 해에 인관의 나이는 80세이고, 아들 설은 26세 때이다.

인관의 출사는 15곳이기 때문에 20년으로 계산한 것은 가상해본 것이고 조선조 초기 때 벼슬 기간은 한 직급 한곳에 보통 3년이었으나 세월이 가면서 기간이 짧아져 임진왜란 때는 채 1년이 못되었던 것이다. 그러니 인관이 벼슬을 끝나고 광양현 옥곡면 지역으로 와서 말년을 보냈을 것으로 유추해 볼 수 있다.

다만 이 연대만 따지면 인관이 와서 정자를 세우고 말년을 보냈다고 해야 옳을 듯하다. 그런데 인관의 유업을 기리기 위해 아들인 정설이 송강로부터『수월정유허비』란 비명을 받아 1573년에 비를 세웠다는 기록 보면 혼란스럽다. 송강은 1593년 강화도에서 세상을 떴기 때문에 더 어려워지고, 송강은 1536년생이니 인관과는 43세의 나이 차이며 설과는 9년 차이가 된다.

그리고 정설에 관한 광주정씨 족보에 자는 원결인데 1547년(명종2)에 출생하였다. 1576년(선조 9) 유학으로 문과에 급제한 후 1593년에 충청감사로 재직했고, 1597년(선조 30)나주 목사를 역임하고 50세에 관직을 버리고 라는 기록 또한 오류인 듯하다. 나주목사는 선조 31년 1598년 1월부터 5월까지이다.

그 후 광양 옥곡에 우거하면서 섬진강변에 수월정을 짓고서(設築 = 選築) 유유자적하였는데, 송강 정 선생이 그 서문을 찬하였다. 묘소는 선친 옥천공 묘의 계단 아래 있으니 좌향은 유좌이다. 배우자는 완산최씨로 부친은 인효이며, 묘소가 옥곡면 선적리 어양동 축좌에 있다. 양자는 여기이다. 라고 수록돼 있음을 보면 나주목사를 끝내고 광양으로 옮긴 것이 합당해 보인다. 

수월정을 언제 어디에 짓고, 수월정유허비는 언제 건립했으며 누구인지의 확실한 근거를 찾을 희망의 끈은 있다. 지금 수월정이 있는 다압면 도사리에 거주하는 박 모 씨는 현재 세워져 있는 수월정유허비(1971년)의 전신(옛, 수월정유허비)을 묻어(埋葬)두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전설이 아니고 본인이 직접 작업을 했기 때문에 그 장소가 보존돼 있다. 남은 것은 섬진진에 관한 사료조사와 묻혀있는 수월정유허비를 발굴해 보면 의문이 해결될 것으로 믿어진다.

비의 발굴에 관해서는 광양시에서 행정적인 절차를 거쳐 추진할 것이니 기다려 보자, 그리고 나는 섬진진에 관한 사료조사료를 찾으러 떠나니 후에 결과 발표 때 뵙기로 하고 그동안 읽어주신 독자에게 감사드리며 펜을 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