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 사람이 하나 된 곳 … 히말리아 전설의 불교왕국‘라다크’를 가다
자연과 사람이 하나 된 곳 … 히말리아 전설의 불교왕국‘라다크’를 가다
  • 김양환
  • 승인 2016.08.12 20:30
  • 호수 67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트래킹 도중에 만난 뉴질랜드 부부와 현지 가이드.

라다크라는 이름은“고갯길이 있는 땅”이라는 뜻의 티베트 말‘라-다그스’에서 나온 말이라는 설이 있다. 히말라야의 그늘 속에 있는 라다크는 산맥들이 이리저리 얽혀져 있는 고지대의 황무지이다.

인도에 속해 있지만 문화적으로는 티베트에 속하고 실제로 작은 티베트로 불린다. 인도인의 종교가 80% 정도가 힌두교이지만, 라다크는 티베트의 대승불교가 주된 종교이고 달라이 라마가 정신적 지도자이다. 우리 일행이 트래킹을 마무리하는 7월 28일에 달라이 라마가 라다크에 왔다는 뉴스를 들었다.

라다크는 약 950년부터 1834년 힌두 도그라스의 침략을 받을 때까지 독립적인 왕국이었다. 도그라스가 카시미르를 장악하자, 라다크와 그 이웃인 발티스탄은 자무와 카시미르의 왕 지배하에 들어간다. 1947년 인도-파키스탄 전쟁 이후에 발티스탄 지역은 파키스탄에, 라다크는 인도의 자무와 카시미르 주에 속하게 된다. 중국이 1950년 티베트를 침공하고, 1962년 라다크를 공격하면서 라다크는 분쟁 지역이 된다.

라다크 왕국의 수도‘레’. 많은 트래커들이 이곳에서 고소증에 대한 적응을 하는 장소다.

이에 따라 인도 정부가 국경 분쟁에 따른 군인들을 파견하면서 라다크와 인도대륙을 연결하는 히말라야 횡단도로를 건설하게 되고, 고립지역이었던 라다크는 변화를 맞이한다. 인도 정부는 1974년 라다크를 외국 관광객에게 개방을 발표한다. 이로 인해 안정되고 평화로웠던 라다크는 세계화와 관광과 정치로 인해 공동체 내부에 긴장이 생기고, 환경이 파괴되고, 사회적 해체와 경제적 붕괴가 한꺼번에 일어난다.

라다크 사람들은 개방되기 전에는 외부와 격리되어 살면서 서로가 형제처럼 지내고, 경제적으로 부족한 환경 속에서 소똥 하나도 재활용하는 지혜를 터득했고, 척박한 땅에서 자급자족하는 근면성을 가졌다. 그러면서도 그 누구보다도 행복을 느끼며 살아왔다. 하지만 관광객이 들어오고 자본주의가 물들면서 라다크 사람들은 하나 둘씩 불행의 길을 걷고 있다.  

라다크는 여름에는 너무 뜨겁고, 겨울에는 영하 40도까지 내려가 8개월 동안은 전 지역이 얼어붙는 혹심한 기후다. 일 년 강우량은 100㎜ 미만이다. 라다크 마을은 3500M의 고도여서 작물을 기를 수 있는 계절은 수개월이 못되고, 짐승들도 별로 없고 물은 귀하다. 그러나 오랜 세월 동안 라다크 사람들은 이 특이한 환경에 적합한 독특한 농사체계를 발전시켜왔다. 농토는 높은 산의 얼음과 눈이 녹아 흘러내린 물을 여러 방향으로 공급해주는 수로체계로 관개되어 있다.

보리농사를 주로하고 밀도 심는다. 음식은 구운 보리가루‘은감페’로 만든 음식을 먹는다. 가축은 야크, 소, 양을 기른다. 농사를 짓는 데는 야크와 소를 교배한‘조’가 맡는다.

무거운 짐을 싣고 트래킹을 함께할 말들.

 

“줄레”를 외치는 순수함이 느껴지는 라다크 사람들

라다크에 가기 위해서는 인천공항에서 델리까지 약 8시간을 가서, 다시 국내선 비행기를 갈아타고 라다크의 수도인 ‘레’까지 1시간 40분을 가야한다. 버스로는 36시간이 걸린다. 우리 일행은 인천 공항에서 오후 8시40분 비행기를 타고 인도 델리공항에 새벽 4시30분에 도착했다. 인도는 시차가 한국보다 3시간30분이 늦어 인도 시간으로 새벽 1시였다. 도착 후 바로 호텔로 이동해 숙박을 하고 오전 8시40분 비행기로 라다크의 최대 도시‘레’에 도착했다. 주름이 가득한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줄레”를 외치는 라다크 사람들은 그냥 봐도 순수함이 묻어난다.“줄레”는 라다크 사람들의 인사말인데“안녕하세요”부터 모든 인사가“줄레”다.

현지 가이드인 텐진은 턱수염을 기르고 더운 날씨인데도 목도리를 했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목도리는 햇볕이 강해 목 보호 때문이고, 턱수염은 패션이었다. 가이드들이 거의 비슷한 차림이다.

레는 해발 3520미터의 높이로 약간의 고소증상이 느껴졌다. 레 시내는 고층 건물은 없고 대부분 2층 건물이고, 간혹 3층 건물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거리에는 유럽 사람들과 미국 등 서양인들의 모습이 많고 동양인은 가뭄에 콩 나듯 볼 수 있다. 도로는 대부분 비포장 도로이고 중심가는 포장이 돼 있다.

길거리 노점상에는 살구와 사과 등을 파는 할머니들이 지나는 행인을 부른다. 살구나무는 라다크에서 가장 많은 과일나무로 열매 크기는 한국의 살구 보다 작지만 맛은 좋다. 사과도 골프공 크기 정도다. 과일은 눈금저울에 무게를 달아 판다.

라다크에는 곰파(라마교의 절)가 많다. 어느 도시를 가나 곰파를 찾아가는 여행이 될 수밖에 없다. 레에서 처음 방문한 샹카르곰파는 천개의 손과 천개의 얼굴을 가진 천수천인상이 모셔져 있는 곰파다. 라다크의 대부분의 곰파는 가장 높은 언덕에 자리하고 있다.

샹카르곰파도 언덕을 한참 걸어 올라가서 구경을 할 수 있었다. 덕분에 시가지가 한눈에 보인다.

다음 목적지는 레 왕궁. 중세 티베트 건축 예술 걸작품으로 라다크 왕조의 수도였던 레의 가파른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다. 티베트 라사에 있는 유명한 포탈라궁의 축소판이라 하여‘소 포탈라궁’으로도 불린다. 반세기 뒤에 지어진 포탈라궁이 레 왕궁을 모델로 지었다고 한다. 16세기 라다크 왕국의 전성기에 때 남걀 왕이 건축했다.

9층 규모의 건물로 도시가 내려다보이는 울퉁불퉁한 바위산 위에 우뚝 솟아 있다. 건물 내부에는 유물은 별로 없고 방치된 느낌이 든다. 조금씩 건물을 수리하고 있는 장면이 보인다.

다음날 레보다 약간 고도가 낮은 알치(3200미터)로 2시간 정도 걸려 이동했다. 알치에 가는 길에는 인더스강과 잔스다르크강이 만나는 합류지점이 있다. 강과 강이 합쳐지는데 강물 색깔이 확연이 다르다. 알치는 고소 적응을 하고 트래킹을 준비하는 캠프 역할을 하는 도시다.

호텔에 여장을 풀고 사무실 겸 휴게실에 들리니 와이파이가 터진다. 그동안 연락이 두절된 상태에서 와이파이는 물 만난 고기 격이다. 다들 가족에게 카톡으로 안부를 전한다. 하지만 연결 상태는 별로다.

알치는 많은 트래커들이 모여 있어서 마을이 활기차다. 알치도 유명한 곰파가 있다. 알치 곰파는 다른 곰파와 달리 린젠장포대사가 평지에 세운 사원으로 내부에 그려진 벽화와 1천여개의 불상이 있어 유명한 곳이다. 마을에는 살구나무가 많아 입맛이 떨어진 일행들이 살구로 배를 채운다. 알치는 마을이 잘 정돈되어 있어 다른 마을과 비교된다. 주민들도 여유가 있어 보인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