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며-이혜선 시민기자
살아가며-이혜선 시민기자
  • 광양뉴스
  • 승인 2017.06.02 18:17
  • 호수 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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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할머니…엄마의 엄마

외할머니께서 하늘소풍을 떠나셨다. 향년90세. 살만큼 충분히 살다 가신 거라고 하신다. 그래도 이별은 언제나 가슴이 시리다. 외할아버지를 20년 전에 떠나보내시고 홀로 지내오신 우리 할머니. 엄마가 외할머니 뵈러 가는 날은 특별한 날을 빼고는 항상 나와 함께였다.

혼자 지내시니 낮 시간은 대부분 마을회관에서 동네분들과 시간을 보내셨기에 할머니를 뵈러가면 응당 마을회관을 먼저 들려야했다.

“할머니, 저 왔어요~”

“아이고, 니가 뉘냐~”

“할머니 저 혜선이에요.”

“아이고 우리 혜선이가 왔냐? 엄마도 같이 왔냐?”

두 손 맞잡으시며 한 결같이 반가워하시던 우리 할머니. 엄마는 손녀 손을 잡고 나는 할머니 손을 잡고 외갓집으로 가는 게 순서였다.“밥은 먹었냐. 안먹으면 밥먹어야지.”언제나 그렇듯 손주들 밥걱정부터 하시고 증손주를 안아보신다.

할머니께서 애기 재롱 보시는 동안에 엄마는 집에서 만들어온 반찬을 올려 소박한 밥상을 금새 내오시고 작은 밥상에 둘러앉아 안부를 물으며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어느새 일어날 시간이다.

“할머니 저 애들 학교에서 올 시간이라 가봐야해요.”

“그래 갈래”

할머니의 힘없는 목소리에 일어서는 엄마도 나도 죄송스런 맘이 앞선다. 할머니께 인사드리고 외갓집을 나서는 발걸음은 항상 무거웠던 것 같다.

가족행사가 있는 날엔 마무리는 항상 외갓집이었다. 엄마형제 5남매에 손자손녀들, 거기에 증손자·손녀까지 행사마다 모임마다 인원은 다르지만 어쨌든 모임이 있는 날은 외갓집이 잔칫집처럼 북적였다. 그때가 우리 할머니의 가장 환한 미소를 볼 수 있는 날이었다.

할머니가 웃으시면 더 기분이 좋아지는 우리 식구들. 하지만 각자의 삶이 있으니 때가 되면 집으로 가야한다. 집으로 돌아갈 때 할머니는 마을회관까지 나오셔서 자식들 배웅을 해주셨다. 아쉬움이 가득한 목소리에 표정이셨지만 걱정말고 잘 가라고 손을 흔들어 주시던 할머니.

해가 더해갈 수록 마을회관 앞이 아닌 대문 밖, 마당, 마루 앞 평상 그리고 마루로… 배웅해주시던 자리가 바뀌었다. 언제나 정정하실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맘을 아프게 하는 부분이었다. 할머니를 남겨두고 돌아오는 길, 엄마의 모습에서 깊은 한숨과 쓸쓸함이 묻어났다. 엄마의 엄마가 나이드시고 힘이 없어지고 약해지는 모습을 보는 건 누구에게나 참 슬픈 일이기 때문이다.

외삼촌들과 이모들도 모두 같은 맘이셨으리라.

이사하고 처음으로 할머니가 우리집을 오신 적이 있다. 엄마가 아이들을 봐주시러 우리집에 와계셨었는데 마침 그날 큰이모와 막내이모 내외께서 할머니를 만나러 외갓집을 오신거였다. 손녀딸 이사했으니 거기 구경 한번 가보자며 이모들께서 할머니를 모시고 오셨다.

집에 오신 할머니는 다른 때보다 더 쇠약한 모습이었다. 넓은 집으로 이사 잘했다고 장하다고 하셨던 우리 할머니. 함께 밥을 먹고 미용기술 갖고 계신 막내이모가 할머니 머리도 다듬어 드리고 욕조에 따뜻한 물 받아 엄마와 함께 목욕도 시켜드렸다.

“손녀딸집에서 목욕도 하고 잘했네 잘 왔네”이모의 말씀에 뿌듯한 맘이 들었었다.

하지만 그게 우리 외할머니의 처음이자 마지막 방문이었다.

가슴에 통증을 호소하셔서 막내외삼촌이 병원을 모시고 가셨는데 응급으로 수술을 해야할 상황이 된 것이다. 수술 소식에 할머니를 뵈러 달려가니 엄마도 나도 못알아보신다. 수술한지 얼마 안되어 그런건가 했지만 회복하셨다가 나빠지길 반복하면서 그런 일이 자주 일어났다. 할머니께도 자식들에게도 참 맘이 아픈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나이도 많으시고 작은 몸에 체력도 약하니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았다. 근처 요양원으로 모시게 되었고 엄마는 우리집에서 지내시는 동안 자주 할머니를 뵈러 다니셨다. 어떤 날은 혼자, 어떤 날은 아이들을 데리고 가셨다. 어떤 날은 알아보셨고 어떤 날은 잠만 주무셨다. 깨어있을 때도 있지만 못 알아볼때가 더 많았다.

엄마는 그런 할머니를 보며 얼마나 맘이 아프셨을까. 사랑하는 우리 엄마가 나를 못알아본다 생각만해도 가슴이 시큰거리고 심장이 두근거리는데 엄마는 얼마나 맘이 쓰라리셨을까.

부산에 사시는 큰외삼촌께서 혼자 할머니를 뵈러 오신 날 아이들과 함께 동행하게 되었는데 퉁퉁부은 모습으로 산소튜브를 끼고 누워계시는 할머니를 보는 것도 맘이 아팠지만 그런 어머니를 보는 큰외삼촌을 보는게 더 아팠다. 할머니를 바라보시는 삼촌의 그 슬픈 눈빛을 잊을 수가 없다. 이별이 얼마남지 않았다는 걸 우리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할머니는 병상에 계시다 그렇게 이곳을 떠나셨다. 길게 아프지 않으셔서 크게 고생하지 않으셔서 다행이란 생각도 든다. 서두르지 않고 가족들에게 이별할 준비를 시간을 주신 것도 감사하다. 헤어지는 순간까지도 우리 할머니는 자식들을 배려해주신 듯하다.

삼일간의 장례식. 할머니를 보내드리는 시간이 금방 지나가버렸다. 온 가족이 할머니와의 헤어짐을 슬퍼했다. 저마다 슬픔의 모양과 크기는 다를테지만 모두가 같은 맘이었을 것이다. 할머니는 먼저 가신 할아버지와 삼촌들이 계신 곳에서 함께 지내시게 되었다. 바람소리, 새소리, 들꽃향기를 벗삼으며...

90년을 살다가셨으니 할머니께서 남겨주신 추억도 그만큼이다. 내 나이 만큼 쌓여 있는 할머니가 계시는 풍경이 아직도 선한데 이젠 외갓집에 할머니께서 계시지 않는다는 것이 눈물이 난다. 그리고 더 맘이 아픈 것은 내 엄마의 엄마가 더 이상 이 곳에 계시지 않는 다는 것. 나는 엄마하고 부를 사람이 있는데 우리 엄마는 이제 엄마라고 부를 사람이 없다는 것. 엄마의 그 깊은 슬픔을 짐작조차 하기 어렵겠지만 잘 이겨내시게 도와드려야겠다.

사랑이라는 가장 큰 유산을 남겨주신 우리 외할머니, 구갑순 여사님.

영면하세요. 사랑해요 할머니.

우리는 할머니가 항상 보고 싶고 그리울 거예요.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