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의 향기> 여름의 기억
<생활의 향기> 여름의 기억
  • 광양뉴스
  • 승인 2017.07.28 18:40
  • 호수 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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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미경 한국문인협회 광양시지부사무국장

바다는 끊임없이 출렁이고 사철 변함없이 푸르렀지만, 그것은 늘 나를 속이곤 했다. 가슴이 온통 녹색으로 충만했던 소녀 시절, 그 바다는 가없는 내 꿈의 원천이자 동시에 절망이기도 했다. 그렇게 바다는 언제나 나를 놀렸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녔던 60 년대 말 시골에서는 공부보다는 당장 먹고살기 위한 방편으로, 농사짓기나 고기 잡는 일에 아이들의 몫이 컸다.

그래서 농사일이 바쁜 철은 책상이 군데군데 빌 정도로 결석률이 높았다. 나 또한 예외는 아니어서 결석까지는 하지 않았지만 조퇴를 가끔씩 했던 기억이 있다. 그러니 요즘 아이들처럼 머리를 싸매고 공부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노릇이었고, 그나마 결석 안하고 학교에 다니는 것만으로도 부모님께 감사해야 할 정도였다.

그 가운데서도 내가 가장 힘들어했고 하기 싫었던 일은 보리타작 하는 것과 콩밭의 김을 매는 일이었다. 논농사는 놉을 사서 하기도 했지만 열 마지기가 넘는 밭농사만은 어머니 혼자서 직접 다 지으셨기 때문에 어린 우리들이었지만 거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고구마와 감자를 캐는 일은 그래도 재미가 있었다. 가슴 두근거리며 땅을 파서 보물처럼 쏟아지던 굵직굵직한 열매들을 보면서 환호성을 질렀던, 그 때의 환희와 신비로움들. 하지만 가만히 앉아 있어도 땀이 줄줄 흘러내리는 뙤약볕 아래에서 보리타작을 하고 김을 매는 일은, 어린 나에게는 정말 가혹한 노릇이었다. 그래서 나는 보리를 베고, 콩밭을 매야 하는 여름이 싫었다. 얼굴이 뽀얗고 살결이 하얀 도시 아이들이 피서를 와서 모래밭에다 텐트를 쳐 놓고 수영을 즐기는 모습들을 보면 괜히 눈물이 나곤 했다. 그래서 나는 자주 바다가 야속하고 미웠다. 나도 도시에서 살았더라면 저 아이들처럼 피서나 다니고 신나게 놀았을 터인데 하는 생각에.

무엇보다 나는 그 시원한 바다를 눈앞에 두고도 풍덩 뛰어들 수 없다는 사실이 더 비참하고 고통스러웠다. 나도 모르게 새어나오는 한숨과 함께 다시 호미를 들고 밭이랑 속으로 들어서면, 금방 가슴을 헉헉 막히게 하던 지열들. 그 때마다 나는 늘 어디론가 멀리 도망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 것은 결코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하지 않으면 어머니나 언니가 더 힘들어야 한다는 것을 어린 나이에도 깨달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마다 다시 안간힘을 써 보았지만 언제나 나는 내 몫을 다 채우지 못한 채 허덕거리곤 했다. 땀은 비 오듯 쏟아지고, 눈은 따갑고 온 몸은 끈적거리고 나중에는 땀과 눈물이 범벅이 되어 오래 서러워진 나머지, 문득문득 작은 입술을 깨물며 나는 다짐하곤 했다.

나중에 콩밭이 많은 사람과는 절대로 결혼을 하지 않을 거라고. 그런데 내 머리 위의 하늘은 또 어찌 그렇게도 맑고 푸르던지. 내 마음과는 달리 너무나도 화창한 그 하늘이 얄미워 입술을 삐죽대는 나를 보고 어머니께서는 말씀하셨다.  

“어떠한 어려움이라도 참을 줄 아는 사람만이 큰일을 할 수 있다. 정 하기 싫고    힘들면 하지 않아도 된다.”

어머니의 그 준절한 한 마디는 나의 입에서 더 이상의 불평을 나오지 못하게 만들었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긴 밭고랑을 타고 말없이 풀을 뽑아내시는 어머니의 모습은, 그 어떤 호령보다도 무겁게 내 가슴을 눌렀던 것이다.

난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잡초를 찾아 열심히 호미질을 해야 했다. 세상에는 때로 자유로운 선택이 더할 수 없는 고통임을 깨달으면서. 그리고 부모님의 사랑 또한 가끔은 채찍이지 않으면 안 되는 이치를 생각하면서. 

그렇게 하다 보면 밭이랑 사이사이에는 어느 새 뽑아 놓은 잡초들이 내 키만큼이나 수북이 쌓이곤 했다. 그 것을 보면서 나는 인내의 힘을 배웠고, 잡초 더미와 더불어 미래에 대한 꿈도 함께 쌓아 갔다.

그러면서 나는 가물거리는 시야 속으로 달려오는 푸른 숲의 향기와 새들의 노래 소리, 그리고 잠시도 쉬지 않고 끈질긴 삶을 외쳐 대던 매미들의 합창, 그 모든 것들을 가슴에 모으며 위안을 받고자 했다.

사실 일이란 것도 끝없는 고통만은 아니었다. 김매는 일이 끝났을 때 시원한 나무 그늘에서 꿀맛 같기만 한 새참이나 점심을 먹는 것처럼, 모든 일은 다 끝의 산뜻한 기쁨이 있었다. 그래서 누군가가 노동을 마음의 영양이라고 했던가. 사실 일은 모든 것을 정복하는 도구로, 그 결과의 쾌감은 고달팠던 회상을 더욱 감미롭게 만든다. 

어쨌든 당시의 아득한 느낌의  밭고랑, 내 작은 몸으로는 너무도 벅차게 여겨졌던 오뇌의 땅 위에서, 그 모든 것들이 나를 위로하고 가르쳤듯이 나 또한 다른 사람들의 가슴에 가냘프나마 빛이 되리라고 결심했다. 그래서 나는 일찍부터 고진감래(苦盡甘來)라는 말을 좋아했는지도 모른다.

눈물 젖은 빵을 먹어 본 사람만이 인생의 진미를 안다고 한 것처럼. 결코 일을 모르면 삶의 재미도 터득할 수 없다는 것을 깨우치면서.

김을 다 매고 어둑한 땅거미를 밟으며 들녘을 나와 시원한 개울물에서 낮 동안 흘렸던 땀을 닦을 때의 그 상쾌한 기분이란! 정말 돈 주고는 살 수 없었던 소중한 기쁨이었다.

돌이켜보아 힘들었다는 느낌은 늘 생각뿐이고, 마지막에 남는 건 언제나 달콤한 향수. 나는 자주 그 향수 때문에 가슴이 저릴 때가 많다. 무엇보다 노동의 대가와 함께 한 톨의 쌀알의 의미가 무엇인지 깨닫게 한, 그 어느 학교 교육보다 소중했던 산 체험, 그리고 정직한 땅의 생리를 빨리 깨우친 행운은 확실한 내 인생의 밑거름이 되었으리라.  

별이 무더기로 쏟아지는 밤이면 평상에 드러누워 알퐁스도테의 별을 찾고, 그러다가 나는 데미안의 이상과 꿈을 안은 채 잠이 들곤 했다. 때로 모래밭 위에 자리를 깔고 누워 철썩이는 파도 소리 들으며, 나와 별이 하나가 되어 뒹굴 때면, 나를 침울하게 했던 바다를 용서할 만큼 마음이 넓어지곤 했다.

온종일 걸어도 신발에 흙 한 줌 묻어나지 않는 도시의 아파트에 살면서 나는 그 동안 얼마나 많은 것을 잃어버렸는가. 서럽고, 그래서 가능한 되돌아보고 싶지 않았던 지난날들이야말로 내 인생에 있어서 더없이 값지고 소중한 것이었음을 깨달으며, 나는 이제야 고향 잃은 나그네가 된다. 

보리를 베다 손가락을 베는 순간, 아버지 몰래 도망을 치다 미끄러져 곤두박질을 치면서 바라보던 그 염오의 하늘과 바다. 그 때의 그 구름 조각들은 왜 그렇게도 미웠던지. 손에서 흐르는 빨간 핏방울로 선연하게 물들던 하얀 물방울의 검정 치마, 그 위에 거머리처럼 붙어 온몸을 간질이며 굳세게 기어오르던 보리 까끄라기.

그래도 그것은 나에게 모두가 아릿하고 정겨운 삶의 편린들이었다. 20리 길을 걸어서 학교에 갔다 오다 주린 배를 다스리지 못해 아이들과 밀서리를 하던 일도 이젠 영원히 돌아갈 수 없는 애틋한 그리움들이다.

한 때 그토록 싫어했던 여름 속에 나는 지금 서 있다. 그 허정의 계절을 맞이하여 내 마음은 어느 새 고향 언덕으로 달려간다. 아슴한 기억의 저 편, 늘 푸른 바다가 녹색의 가슴을 속이곤 하던 그 곳. 밭이랑 사이에서 방황하던 작은 여자아이의 순수하고 소박했던 가슴에, 까닭 없는 비애를 안겨 주던 그 옥색 바다. 아, 그런데 나는 왜 그 거짓말쟁이 바다와 까끄라기 보리 언덕을 버리지 못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