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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양뉴스
  • 승인 2017.10.20 19:30
  • 호수 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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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영신 광양향교 전사무국장

광양토반에 대한고찰<1-이천 서씨>

 

 

토반(土班)이란‘여러 대를 이어 그 지방에서 토박이로 사는 양반’을 말한다.

광양지역 토반은‘서.정’(徐.鄭)이라고 전해오는데 그 ‘서.정’은 이천(利川) 서씨와 광주(光州:광산) 정씨를 말한다.

인근 시군 토반을 보면 △순천 조.정.양(趙.鄭.梁:옥천 조씨. 경주 정씨. 제주 양씨) △보성 안.이.박(安.李.朴:죽산 안씨. 성주 이씨. 장성 박씨) △고흥 신.송.유(申.宋.柳:고령 신씨. 여산 송씨. 고흥 유씨) △구례 고.장.박(高.長.朴:제주 고씨. 봉성 장씨. 밀양 박씨) △곡성 안.오.조(安.吳.趙:순흥 안씨. 해주 오씨. 옥천 조씨)로 현재에 이르려 전해오고 있다.

광양의 토반인 서.정의 집안은 어느 시대에 입향을 하였으며 어떤 업적과 무슨 유산이 남겨져있는지 살펴보자.

이천 서씨부터 살펴보면 고려 충목왕 3년(정해 1347) 정치도감좌랑(政治都監佐郞)재임 중 원나라 순제 제2비인 기황후(奇皇后) 족제(族弟)가 백성을 괴롭히는 기삼만(奇三萬)을 잡아 옥에 가두고 국문하다가 죽게 한 사건으로 투옥되었다가 공민왕 즉위 풀려나 만년에 광양으로 내려와 졸(卒)하였다.

이후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추증하고 문의(文毅)라는 시호(諡號)를 받은 서호(徐浩)라는 분이 광양에 입향(入鄕)을 했는데 연도(年度)는 확실치 않으나 연대(年代)는 13세기 중반으로 보아 고려말로 추정된다.

문의공 서호(徐浩)의 현손은 자(字)가 낙천이며 휘(諱)가 열(悅)공으로‘백운거사’라고도 칭하였다. 서열은 수의부위(修義副尉) 벼슬에 있다가 연산군(燕山君)이 등극하자 광양으로 귀향하여 백운산에서 거취하던 중 친여동기간과 신재 최산두(광양읍 봉양사주벽)공이 혼인을 맺어 남매간이 된다.

신재 최산두공은 중종 14년 기묘사화(1519)로 화(禍)을 당하며, 서열 역시 그 2년 후 신사무옥(안처겸. 안당 순흥 안씨 집안이 화(禍)를 입을 때: 필자의 조상)때 화를 입고난 후에는 세사(世事)와 뜻을 접고 백운산에서 은거(隱居)하고 지내셨다 한다.(서열 백운거사는 신재 최산두공의 친처남이며 신재 최산두공은 서열공의 친매제다. 그리고 봉강면 밀양 허씨 집안은 신재 최산두의 외가이다.)

문의공 서열의 자(子) 암연처사(巖淵處士) 서천익(徐千謚)공은 성종15년(갑진 1484)에 출생한 자다. 그는 학문에 정진하면서 한 번도 벼슬길에 동요하지 않은 채 독학역행(篤學力行)으로 지내오던 중 중종조에 군자감정주부(軍資監正主簿)로 천거되지만 끝내 나가지 않았다.

서천익은 이후 광양계곡 와룡강 주위에 본인의 호(號)를 붙여‘암연정’(巖淵亭)이란 정자를 지어 후진양성을 위해 갖은 힘을 써 그 문하에 지명(知明)의 선비가 많이 배출되었다. 서천익은 문장에도 능하여 많은 문집을 남겼다하나 병화(兵禍)를 겪으면서 많이 없어지고 다만 상현록(尙賢錄)과 문인록(文人錄)만이 남아있다.

암연처사 서천익공의 현손인 월파 서신귀(月波 徐藎龜)공은 고조부(高祖父)가 지은 암연정을 옥룡면 운곡에 중수하여 김중남(金仲南:의성 김씨-단성. 자이현감을 지낸 분으로 광양 유배 기간 중)공에게 부탁하여 암연정기(巖淵亭記)를 지어 비문을 세웠다.

서신귀는 시(詩)를 지어 고조부를 칭찬하길“가슴가득한 호기(豪氣)는 천심월(千心月)이요. 소매에 들어온 찬 기운은 수면풍(水面風)”이라 하였다. 서신귀는 유석암암연연기연(維石巖巖淵淵其淵)이라는 여덟 글자를 석면(石面)에 새겨 그 정자의 의미가 오랫동안 지속시키겠다는 것이 엿보이기도 한다.

월파공은 이때 해남으로 유배온 고산 윤선도공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광양향교중건에도 깊이 관여해 향교유생들에게도 광양정신을 일깨우게 한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광양군지 1983년도판 p419 “광양읍 월파마을 유래는 조선 중종때 암연처사 서천익공의 후손인 서신기공의호(號)인 월파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당시 향교의 재정이 어렵게 되자 60두락의 논을 희사하는 등 선행을 베풀었으며 1970년도 4월 군내유림들의 발의로 월파공이 낚시를 즐기던 조대(釣臺)라는 바위 위에 월파유적비(암연정기)를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뿐만 아니라 향교남쪽에 있었던 흥학재(興學齋)재건에 있어서도 이천 서씨가 장장(長長) 백년을 넘어 3대(서창우-서윤화-서현두)에 걸쳐 토지구입에서부터 준공에 이르기까지 주도적인 희생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광양군의 문화유적, 순천대박물관+광양시 1993편찬p183)

또한 풍화류와 명륜당 건축도 1720년(경자)에 서지하공의 6대조 서상익(徐尙翊)공이 감역(監役)을 맡았고 1765년(을유) 중수때도 서윤택(서지하공의 증조)공이 유사(有司)를 맡기도 하였다.

1864년(갑자) 당시 이유선 광양현감은 서지하공을 유사로 시켜 전각을 잘 지어놓자 이유선 현감이“할아버지가 손자에게 전하고 또다시 손자에게 전하니 어찌 이를  빛나게 하는 일이 아니겠는가?”라고 하는 현판기록이 전해지고 있다.(남도문화전-2광양(광주박물관+광양시 2011.10p150) 더 나아가 옥룡남정 앞에 있는 오현(五賢)을 모신 옥평사 사적비(이강옥 지음, 박기오 서)로 보아 이천 서씨는 광양의 토반으로서 손색이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