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기고
  • 광양뉴스
  • 승인 2017.10.27 18:29
  • 호수 73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안영신 광양향교 전 사무국장

광양토반에 대한 고찰<2-광주 정씨>

지난 호‘이천 서씨’에 이어 광주(光州:광산) 정(鄭)씨에 대하여 알아보자. 때는 명종10(정축 1557)년 광주 정씨로는 인성(仁誠) (종중회장 정윤선 씨의 14조)이라는 분이 처음으로 광양에 발을 디딘 것이 역사로 이어지는데 그는 벼슬은 없어도 우리 광양 고을에서는 큰 부자라 전하며 사곡일대에서 뿌리를 내린 광주 정씨의‘입향조’라 한다.

그러나 그는 정작 돌아가실 때에 외아들인 열(列)공을 앉혀놓고 내가 생을 마감하면 나주 다시면 선영으로 묻어달라는 유언을 해 아들인 열공은 부친의 유지(遺志)에 따라 숨을 거두자 광양 사곡에서 수백리 멀고 먼길을 마다하지 않고 열두 대매군과 노숙을 하며 한달에 걸쳐  나주 다시면 선산으로 모셨다고 한다.

그리하여 당시 우리 고을에서 그는 이름난 효자로 널리 알려졌다는 구전이 전해지고 있다. 인성은 광양 사곡에서 살다가 돌아가시자 출생지인 선산이 있는 나주로 가셨지만 본인(배위 문화 유씨)은 여기서 태어나고 자라서 졸(卒)하니 그의 후손들이 억만마을 뒷산으로 모신 후, 그 일대에 선산(마로산성 진입도로 인근)을 정하고 선영을 모실 사당을 세워 대대로 세거해왔다고 한다.

그러면서 현재까지도 그 선산과 사당을 관리해 오고 있으며 근대(1860-1910) 이후 광양에 있는 광주 정씨들은 광양시 권역 내이긴 하나 여기저기로 산재(散在)해 열심히들 살고 있다고 광양시 광주정씨 종중회장(정윤선 전 동광양조합장)은 전한다.

그런가하면 다압 섬진에서도 광주 정씨들이 머문 기록이 여기저기 나온다. 조선 선조때 나주목사를 지낸 정설(鄭渫)이 자기 선친의 묘가 있는 곳이라 추모(追慕)의 정을 기리며 한편으로는 만년에 소일(消日)을 보내기 위하여 1573년에‘수월정’(水月亭)이란 정자를 세웠다.

그런데 이곳의 멋진 풍경과 정자의 아름다움에 반하여 오가는 시객 (송강 정철, 수은 강항)들이 수월정기(水月亭記)란 가사(歌辭)를 짓기도 한다.(그 가사 수월정기 중에는“달빛이 비추니 금빛이 출렁이며 그림자 잠겨 둥근옥과 같으니  물은 달을 얻어 더욱 맑고 달은 물을 얻어  더욱 희니 이는 정설의 마음이 맑고 깨끗한 것 같다.”라는 글귀가 나온다) 이런 정황으로 볼때 광주 광산 정씨들이 광양 여기저기에서 15세기에서는 그 세(勢)가 상당했으리라는 짐작이 든다.  

고로, 어쨌든 이천 서씨 집안에서는 13세기에 입향을 하여 옥룡 옥평사 오현을 모시는 것이 타종중(他宗中)에 귀감이 되고 있다.

광주 정씨는 15세기에 입향을 하여 다압 섬진에 수월정을 세워 지나는 과객(過客)들의 이목(耳目)을 모으는 것이 가문을 이끄는 일월(日月)로 보아 우리 광양에서 양대가문(兩大家門)의 표상(表象)은 이천 서씨는 옥평사요, 광주 정씨는 수월정이라 이 조상들의 얼이 길이길이 천추(千秋)를 비추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