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양, 문학에 물들다’<5> 품격 있는 문화도시, 유네스코 문학도시 광양! 문학관 건립으로…
‘광양, 문학에 물들다’<5> 품격 있는 문화도시, 유네스코 문학도시 광양! 문학관 건립으로…
  • 김영신 기자
  • 승인 2017.10.27 18:35
  • 호수 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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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정권 항거’ 평생 강을 끼고 산‘구도의 시인’, 구상

올곧은 삶과 문학세계 기린‘구상문학관’

 

‘구상문학관’은 세계 200대 문인의 반열에 오른 구상 시인을 기억하고 한국시문학에 끼친 업적을 보존하기 위해 2002년에 건립, 칠곡군청이 운영하고 있다.

700㎡규모의 2층 건물로, 1층에는 문단 활동 당시의 모습을 담은 사진 자료와 문우와 주고받았던 편지, 서화 등이 전시되어 있고 2층에는 시인이 기증한 2만 7000여권의 소장도서로 서가가 가득 차 있다.

22년간 왜관에 거주하며 창작활동을 한 집필실이자 많은 문화·예술인들의 사랑방이 됐던 관수재(觀水齋)는 시인의 삶과 문학, 구도자적 정신세계를 오롯이 느낄 수 있다.

1919년 서울에서 태어나 일본 유학을 거쳐 북한 원산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중 1946년 원산문학가동맹에서 펴낸 시집‘응향’필화사건에 연루되어 월남한 후 연작시‘강’,‘모과옹두리에도 사연이’,‘시집 구상’,‘초토(焦土)의 시’, ‘그리스도 폴의 강’,‘타버린 땅’,‘유치찬란’,‘밭과 강’,‘드레퓌스의 벤취에서’ 등 10여 권이 넘는 시집과 수상집, 수필집 등을 펴냈다.

건강이 좋지 않아 평생 고통을 겪었지만 팔순의 나이에도‘인류의 맹점’이라는 시집을 내는 열정을 보여주었고 그의 시들은 불어, 영어, 독어, 스웨덴어 등으로 번역되어 우리 문학을 세계에 알렸다.

구상 시인은 북한에서는 적전강을, 서울에서는 한강을, 왜관에서는 낙동강을 끼고 살았다. 평생 강을 끼고 산 시인, 어려서부터 종교적인 분위기에서 자란 시인 구상은‘유유히 흘러가는 한강을 바라보며 걸레처럼 더럽고 추례한 내 마음을 그 물에 헹구고 씻고, 빨아 보지만 찌들은 때들은 빠지지 않는다’며 자신을 성찰하는 구도자의 삶을 살았다.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문학적 감수성과 가톨릭 교육사업과 관련된 일을 하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기독교적 세계관을 가진 시인이었으나 한국의 건국신화와 선불교적 명상, 노장사상까지를 포용하며 맑고 투명한 시를 써왔다.

 

구도의 시들이 잉태되고 태어난 곳

칠곡 왜관

 

구상문학관 바로 앞 육교를 건너면 세차게 흐르는 넓은 낙동강 줄기를 볼 수 있다. 낙동강을 끼고 있는 칠곡 왜관은 구도의 시를 만들어 낸 곳이었다.

연작시‘밭 일기’,‘강’등이 태어난 곳‘관수재’는 천재화가 이중섭, 시인 오상순, 아동문학의 선구자 마해송 선생, 걸레스님 중광, 시인 채민순 신부, 운보 김기창 화백 등과 교감을 나누던 곳이었다.

 

지역 문학동아리 거점 공간으로

적극 활용되고 있어

 

하루 평균 50여명이 다녀가는 구상문학관은 독도문학대전 등 여러 문학상 공모에서 수상자를 내고 지역 문인들의 창작활동 거점공간으로 적극 활용되고 있다. 시, 수필 등 지역의 문학동아리는 일주일에 두 번 문학관 2층 사랑방에 모여 지역 대학의 교수, 관록 있는 유명 문인들을 초청해 문학수업을 진행한다.

박금이 칠곡군청 문학관 근무자는 “구상 시인은 생전에 자신의 이름으로 문학관을 세우는 것을 원치 않았지만 지역 문인들에게 열린 문학공간이 필요하다는 것에 공감했다”며“2002년 문학관이 개관했지만 건강이 나빠서 문학관을 한 번도 와보지 못한 채 2004년 별세했다”며 안타까워 했다.

 

“징역을 살기보다 차라리 사형을 내려달라”

독재정권 맞선 올곧은 지식인, 시인 구상

 

1959년 정치적으로 조작된 레이다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게 되고 법정에서 조국에 모반한 죄목을 쓰고 유기형수가 되느니 사형이 아니면 무죄를 달라고 절규했다. 병원을 운영하던 부인의 힘으로 곤궁하지 않고 비교적 여유로운 생활을 하던 구상 시인은‘향촌의 귀공자’로 불리며 어려운 후배문인들의 밥을 도맡아 사주었고 박정희 독재 정권시절에 여러 제의가 들어왔으나 하와이로 떠나버렸다.

시인 구상은 독재정권의 전횡에 맞서며 한순간도 굴복하지 않는 올곧은 삶을 살아온 지식인이자 역사의 산 증인이었다. 한국전쟁 발발후 국방부 기관지인 승리일보를 만들며 종군했고 이후 신문사에 근무한 시인은  정론직필의 언론인이었고, 학자였다.

 

시인이 왜관에서 보낸 22년의 흔적

옛 건물 그대로 문학관 구성했더라면…

 

책을 출간하고 직접 서명을 해서 구상 시인에게 전해 준‘저자의 서명’이 담긴 6000권이 넘는 책을 보유한 구상문학관은 국내 문학관 중 저자 서명본을 가장 많이 보유한 문학관이다. 2만 7000권의 책을 보관하는 2층 서가 한 구석에서 2005년에 발간한 광양시지를 발견하고 사람을 만난 듯 반가웠다.

왜관읍이 외가였고 어릴 적 왜관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는 한 관람객은“문학관이 있는 현 위치는 구상 시인의 부인이‘순심병원’을 하던 자리와 그 옆 살림집, 그리고 시인이 지인들과 시간을 보내던 곳이었다”며“모두 허물고 다시 신축을 했다. 그대로 두고 문학관을 구성했더라면 그 시절의 모습을 더 기억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장소가 되었을텐데 아쉽다”고 말했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