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년에 가져보는‘행복감’
노년에 가져보는‘행복감’
  • 광양뉴스
  • 승인 2017.12.01 18:27
  • 호수 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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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이종태(광양문화원 부원장)

가슴이 그렇게 따뜻하지도 못하면서, 시답잖은 드라마를 보고도 눈물을 감추지 못해 아내와 딸들로부터 놀림을 당하며 살았는데, 나이가 드니 안구를 자주 촉촉이 적셔 주어서 그런지 이 나이에도 작은 활자의 책이나 핸드폰 문자를 돋보기 없이 볼 수가 있어, 주위 벗들로부터 부러움을 받으니 참으로 행복하다.

조부께서는 동학농민운동 때 열심히 참여하시어‘집강소’(농민군이 전라도 각 고을의 관아에 설치한 자치기구) 로부터‘통정대부’라는 칙령을 받았다. 모진고생과 죽음을 넘나들었던 과거가 너무 뼈아파“천직(踐職)이 자식을 보전한다”며, 자식들에게 농사가 천직(天職)임을 유언하셨고, 효심이 남다른 선친께서는 밥상머리 앉으실 때 마다“등허리에 뿔난 놈(지게를 진사람) 은 전쟁도 피해 간다”시며 나에게 중학교까지만 다니라고 늘 말씀하셨다. 지역 고등학교를 나와 37년간 직장생활을 마친 후 공부가 한이 되어 책과 신문을 항상 가까이 두었다. 경로우대 나이에 대학4년을 다시 공부하였고, 지금까지 아침 일찍 일어나 책을 읽고 저녁에는 글을 쓰는 이 만학(晩學)의 즐거움을 무엇과 비교하겠는가?

부모님과 다섯 형제자매가 초가삼간에서 기거하다보니 막둥이인 나는 부모님과 한방을 썼다. 부모님은 쉰둥이인 나를 사이에 두고 담뱃대의 불을 번갈아가며 끄지 않으셨다.

간접흡연으로 고등학생 때부터 기관지에서 불편한 소리가 나고 기침 가래가 그치질 않았다. 첫 봉급을 받고 지방병원을 찾으니 항생제와 설파제를 처방하여 주었으나 약을 먹을 때만 증상이 멈추고 별 효험이 없었다. 전남대 병원을 찾으니 이미 근본치료는 불가능하다며 독감과 폐렴을 조심하면서 좋은 컨디션과 체력을 유지하라고 당부하였다. 그때부터 나는 틈틈이 산행을 생활화 하였다.

자식들이 학생신분일 때 건강한 일남 이녀를 앞장세우고 아내와 온 가족이 모처럼 대화를 하며 지리산종주를 자주한 경험은 내 일생에 가장 소중한 추억으로 기억되고 있다.

나는 총각 샘, 선비샘물을 마시며 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물을 마실 수 있는 사람은 부나 명예, 권력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가장 갈증이 심한 사람이며, 가장 편히 쉴 수 있는 사람 또한 가장 열심히 땀 흘린 사람이라 생각하며 일생의 좌우명으로 삼아왔다.

최근에는 칠순의 나이에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트래킹을 다녀오는 감격도 경험하였다. 부모님의 흡연으로 기관지가 나빠져 택한 산행습관이 상복약 없이 노년을 보내고, 한 걸음 한 걸음 올려 딛는 것을 작은 성취로까지 생각하며 행복을 확인해 가는 이 즐거움 또한 부모님 은덕이라 생각하며 살고 있다.

선친께서는 손등의 푸른 핏줄을 보여주시며 소발자국과 닮았다 하시며 생전에 소를 그렇게 좋아하시고, 소를 두 마리를 기르시는 경우가 많으셨다. 군대 간 형님이 군에서 나누어준 건빵을 먹지 않고 모아두었다 한 배낭 메고 휴가를 올 때나, 시집간 누나가 감홍시를 가득 채운 석짝을 이고 집에 올 때에 나는 형님 누나 곁에서 맴돌고 싶었으나, 소를 먹이고 오라는 아버지 명령을 어길 수가 없었다. 깔(꼴)을 베다 손가락을 깊이 베이고, 뱀에 놀라 혼줄이 나고, 벌에 쏘이면서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 시절을 소 옆에서 보냈다.

소를 몰고 마을 인근 산등성이에 올라 영어단어를 외우기보다는 푸른 하늘과 대부분 노랗게 초가지붕으로 덮여진 광양읍 전경, 멀리 초남 앞바다를 바라보며 혼자 사색에 잠기곤 하였다.

한때는 학창시절 문학전집을 읽지 못한 것을 후회도 해보고, 부모님을 설득하여 인근 시의 인문학교를 가지 못한 아쉬움도 남지만 나이 들어 욕심 없이 이렇게 마음 편히 사는 것은 정든 고향에서 좋은 벗들과 도토리도 줍고, 콩서리 감자서리하며, 동·서천 맑은 물에서 피라미 잡으며 즐겁게 살아온 덕이라 생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