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 광양현감‘박세후’ 아니다!”
“초대 광양현감‘박세후’ 아니다!”
  • 김영신 기자
  • 승인 2017.12.15 17:54
  • 호수 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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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정 씨, 고려말 ~조선 중종 감무와 현감 8명 찾아내

그동안 광양시지에 첫번째로 기록되면서 정설로 받아 들였던 초대 광양현감이 ‘박세후’가 아니라는 주장이 나와 지역 문화·역사계에 이목이 집중될 전망이다. 이 주장이 고증을 통해 사실로 확인될 경우 광양현감의 기록은 100년 이상 앞당겨지는 것은 물론, 그동안 각종 자료집을 통해 설명했던 광양현감 역사에 대해서도 재수정이 불가피해 보인다. 지역 향토문화에 관심이 있는 한 시민이 각종 자료를 뒤지고 연구한 끝에 박세후 이전의 광양현감 기록을 찾아낸 성과다.

‘광양’의 지명은 삼국시대는 마한, 백제시대에는‘마로현’, 통일신라 경덕왕때는‘희양현’으로 불리어 오다 고려 태조 23년인 940년에‘광양현’으로 이름이 바뀌었고‘감무’를 두어 고을을 관리했다.

‘감무’라는 관직은 지금의‘시장’의 역할을 하는 벼슬아치로 조선 초까지 ‘감무’로 불리다가 1413년 (조선태종 13년)에 와서‘현감’으로 개칭했다.

광양현 현감에 대한 기록은 2005년 발간된 광양시지 제 2권 145페이지에 1528년(조선중종 23년)에 부임한 박세후라고 등재돼있다. 이 기록에 의거, 오늘날 시민들은 광양 초대현감이 박세후라고 알고 있지만 1374년 고려 말에서 1528년 조선 중종까지 154년간 현감에 대한 기록이 없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시지에는 1528년에 부임한 박세후 현감 이후 1896년 마지막 현감 김우근까지 216명의 현감 이름이 실려 있으나 박세후가 부임하기 전인 1413년부터 1528년까지의 115년간 현감에 대한 내용이 전혀 없다.

그런데 최근 광양 향토사에 관심이 많은 김미정 아동문학가가 박세후 현감 이전에 광양을 다스렸던 8명의 광양 현감을 찾아 내 화제다.

김 씨는“시민들이 잘 모르고 있는 광양의 숨은 역사를 알리기 위해 조선왕조실록과 고려사 등 문헌을 꼼꼼하게 뒤져봤다”며“1413년부터 1528년까지 115년 동안 광양 감무나 현감을 지냈던 인물 중 정을보(1352년), 박상복(1427년), 강희려(1432년), 문종로(1455년), 정중형 (1479년), 김광후 (1500년), 이열 (1506년), 한우신 (1508년) 등 8명의 현감을 찾았다”고 설명했다.

‘현감’과‘감무’는 같은 벼슬로 고려(1172년)부터 조선 초 까지‘감무’로 불리다 1413년 조선 태종 때부터‘현감’으로 불렸다. 감무가 있었던 시대는 1172년부터 1413년까지 241년간으로 임기를 2년으로 가정했을 때 120여명이 있었으나 기록이 없다. 시지에 3명이 나와 있고, 이번에 김미정 씨가 찾은 정을보 등 단 4명 이다

또, 1413년 부터 1528년까지 115년 동안은 현감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다. 감무와 마찬가지로 임기를 2년으로 가정 했을 때 약  60여명의 현감이 있었다. 이번에 찾은 7명을 제외하면 50여명을 더 찾아야 하는 셈이다.

조동래 전교는“2005년 시지를 발간할 당시에는 인터넷을 활용해 자료를 찾는 것이 지금처럼 쉽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고 시간이 부족해서 그럴 수도 있었을 것이라 생각된다”며“하지만 단절된 역사는 없다. 기록되지 않은 감무 120명과 현감 60명 등 비어있는 부분을 모두 찾아서 검증과 고증을 통해 끊긴 현감의 역사를 찾아 다시 잇고 온전한 현감(감무)의 역사를 남겨둬야 한다”고 말했다.

 조 전교는 또,“현감에 대한 부분은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을 찾아보면 한 페이지가 아니라 겨우 한,두줄에 불과하다. 그것을 찾기란 쉽지 않다”며“혼자서 하기에는 어려움이 따르므로 별도의 연구모임을 구성해서 미루지 말고, 필요하다면 지원을 해서라도 행정과 시민이 적극 나서서 끊긴 현감의 역사와 더불어 광양의 역사를 찾아내서 후손들에게 남겨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시지에 1번으로 기록된 현감 박세후는 1519년(중종 14년) 별시문과 을과에 합격하여 종 6품 전적 감찰을 거쳐 1528년(중종 23년)에 광양현감으로 부임했다.

박세후는 초남 앞바다에서 불어오는 해풍을 막고 왜적에게 노출을 막기 위해 유당공원, 광양숲, 칠성리 등지에 팽나무등을 심어 숲을 조성하고 사마소를 열어 고을선비에게 학업을 권장, 훌륭한 문사를 배출하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현재 광양읍 우산리 봉양사(광양교육청 앞)에 신재 최산두와 함께 배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