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도시사업단 시민이야기 수상작>
<문화도시사업단 시민이야기 수상작>
  • 광양뉴스
  • 승인 2018.02.02 18:42
  • 호수 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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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것은 낡은 것이 아니라 귀한 것이다” - 광양읍내의 한옥과 목성리 골목길 -
김세광 봉강면 / 하조나라 대표

세월이 흐른다는 것은 얼핏 시간들이 연속적으로 어디론가 사라져 가는듯하지만 시간의 흔적은 끊임없이 쌓여가며 세상을 변화시킨다. 지금 당장은 보잘것없어 보이는 이 땅의 흙 한 줌, 작은 나무 한 그루에도 세월을 덧칠하면 우리가 상상하지 못한 놀라운 풍경으로 돌아오기도 한다. 세월의 힘을 제대로 깨닫는 것 또한 긴 세월을 겪어야 가능한 것이니 무엇보다 사라지지 않고 오래 견디는 것이야말로 세상에 잠재하고 있는 큰 가치인 듯하다.

광양이 낳은 소설가 이균영은 그의 소설‘불붙는 난간’에서 광양의 특색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광양의 집집마다엔 감나무가 있었다. 감나무 아랜 우물, 물을 퍼올릴 때면 물에서 감나무가 보였다. 물을 긷는 건 으레 머리 땋은 처녀들, 감나무와 우물과 처녀가 광양의 세 가지 특색이라 하였다.”

요즘도 광양 읍내에는 그러한 모습뿐만 아니라 앞마당에는 윤기 나는 장독들과 넓은 텃밭이 있어 도심임에도 농가의 한적한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감나무가 있고 우물에 두레박을 내리며 물을 긷는 여인의 모습을 담은 옛 풍경이 문명의 거친 삽질에도 굴하지 않고 오늘날까지 꼿꼿하게 남아있다는 사실이 놀랍기까지 하다.

읍내의 번잡스런 도로에서 골목으로 단 몇 발자국을 옮겼을 뿐인데도 시대를 거슬러 오른 듯 고풍스런 한옥과 골목이 차분하게 그들만의 세계를 지켜가고 있었다. 흘러내린 기와의 곡선이 아름다운 한 집에 들어서니 빛바랜 기둥과 서까래, 때묻은 마루에서 지나간 세월의 깊이를 헤아릴 수 있었다.

그런 흔적이 오히려 한옥에 고고한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있었다. 나는 한동안 툇마루에 앉아 정물처럼 고요한 앞마당을 바라보았다. 가지런히 정돈된 장독대, 아직도 물을 길러 올리는 듯한 우물, 텃밭 모서리에 늘어선 감나무에서 익은 감들이 가을 햇살에 반짝이고 있었다.

긴 세월이 머물러있는 옛집에서 나는 숨죽이듯 내 품으로 스며드는 침묵을 즐겼다. 그 속에서 나는 먼 객지에서 외로웠던 나를 품어주었던 고향을 만나기도 했고 산과 바다를 달리던 어린 시절의 무한했던 자유를 찾아내기도 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 곳에서 나는 따뜻했고 잠시 행복했다.

목성리 뒷골목에는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작은 집들로 빽빽했다. 수많은 집들이 등허리를 맞대며 어둡고 힘든 시절을 함께 이겨낸 듯 오밀조밀 모여 있었다. 길고 좁은 골목은 어디로든 연결이 가능해 보였고 어디서든 단절될 수도 있을 듯한 복잡한 구조였다.

골목을 마주보며 길게 이어진 돌담은 수시로 꺾이고 휘어지며 여러 갈래로 굽어져 있었는데 쇠락한 돌담 사이로 집집마다 숨통처럼 터놓은 작은 창들이 보였고 열린 창틈으로 언뜻언뜻 집안의 풍경이 보이기도 했다.

어쩌다 반쯤 열린 현관문 사이로 두런두런 말소리가 흘러나왔고 호기심이 발동하여 대문 가까이 다가가면 마당에 늘어놓은 잘 익은 고추며 툇마루 끝에 고구마가 쌓인 큰 가마니가 보이곤 했다.

돌담 안으로 감추어진 듯한 그들의 잔잔한 일상이 정겨웠던 옛 기억을 불러와서 잠시 그 마당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충동이 일기도 했다. 그러나 지붕도 담벼락의 높이도 고만고만한 집들이 몰려있는 골목은 단순한 통로가 아닌 굴곡진 역사가 깃든 곳이기도 했다.

여순사건이 터지고 이념이 다른 사람들이 서로 쫓고 쫓기며 날아오는 총탄을 피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것도 골목 덕분이었다는 이야기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때 쫓기던 사람들의 거친 호흡과 가슴을 쓸어내렸던 시간들이 골목 어딘가에 갇혀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정처없이 골목길을 따라 걷다보니 어깨 높이의 낮은 돌담에서는 집을 보호하는 본래의 의미보다는 좁은 골목길을 감싸 안은 듯한 아늑함이 느껴졌다. 처음엔 통로를 몰라 머뭇거리다가도 가까이 다가가면 어느새 작은 틈 사이로 마음을 열어주듯 길을 보여주었다.

미로 학습하듯 선택의 갈림길 앞에 서보는 것도 지난 시절의 중요한 순간들을 복기하는 듯해서 흥미로웠다. 때때로 바람을 쐬고 싶거나 복잡한 일들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 골목길에서 길가는 대로 나를 맡기면 나는 어디로 가는지 내 앞으로 무엇이 나타날지 늘 반복되어왔던 걱정거리는 단 번에 사라져버리곤 했다.

골목길을 따라 걷다보니 지금의 나는 까마득히 잊혀졌고 나는 줄곧 그곳을 살다간 사람들의 세계 속으로 한참 들어가 있었다. 걷는 내내 줄곧 이어져왔을 등굣길의 아이들의 힘찬 재잘거림, 떠나고 돌아오는 사람들의 둔탁한 발걸음 소리, 두부장수의 딸랑이 소리, 연기를 피어 올리는 굴뚝 등 온갖 삶의 모습들이 낮은 담장을 넘어 하늘 멀리 울려 퍼지는 듯했다. 여러 갈래로 얽혀있던 통로를 빠져나올 무렵 내 머리는 오히려 맑아지고 나는 현실을 향해 다시 새로워지고 있었다.

오래 전의 것들이 내게 주는 귀한 깨달음 때문이었다. 내가 읍내에서 만났던 골목길은 좁고 복잡하며 허름했지만 첨단문명 덕분(?)에 오히려 새로웠고 아프고 어둡던 지난날을 아름답게 밝혀 주었다. 세월이 더 지날수록 골목길은 우리에게 큰 힘을 줄 것이란 분명한 믿음이 내 마음을 벅차오르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