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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래 시인ㆍ수필가
광양도 유배지였다
[751호] 2018년 03월 02일 (금) 19:26:00 광양뉴스 webmaster@gynet.co.kr

유배란 무엇이며 무슨 죄로 어디로 가는 걸까. 죄인은 그곳에서 어떤 생활을 했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우리고장에 유배 온 사람은 누구이고 어느 곳에 집중되어있으며 주위의 환경은 어떠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뿌리를 캐서 실체를 드러냈으니 신통하다.

탐학을 저질러 유배를 당한 관리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유배인은 정치적 이유였고 다시 돌아가 갈 수 없는 곳으로 추방되었던 것이다.

유배는 형벌 다섯 가지(사형, 유형, 도형, 장형, 태형) 중 두 번째로 무거운 형이지만 슬픈 이유는 육체적인 고통보다 세상과 단절된 정신적 고통이었기 때문이다. 죄인은 유배지의 삶이 결코 순탄할 수가 없었다. 죄인이 희망하면 유배를 갈 때 조부모와 손자는 물론 첩과 종을 거느리고 가는 경우가 있었으나 대부분 혼자였다. 삶을 예측할 수 없는 것은 갑자기 사약을 받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 고장으로 이배 온 고산 윤선도는 딸과 노비 일부와 함께 했으며 남긴 작품이 발굴됐으니 공개하여 대중화할 필요가 있다. 그 외 김성탁·유자광·정자(정철 큰형)등은 혼자였다. 이들의 죄목이 천차만별인 것은 나라의 혼란과 당파적 적폐 때문이었다.

우리 역사에서 죄인에게 가한 형벌 중 유배는 유형에 해당하며, 죄의 경중에 따라 태형이나 장형을 20~100대까지 맞고 5백리, 천리, 2천리, 3천리 밖이나 제주도로 가게 된 것이다. 심지어 형을 살 곳에 도착하기 전에 운명을 다한 경우도 있었고 이배 없이 한곳에서 생을 마감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러나 천운을 얻어 해배된 후 관직에 귀임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정철은 무려 네 번이나 선조임금에 의해 귀양지에서 해금돼 평창으로 돌아오면 머지 않아 다시 관직에 복귀시켜 국사에 임하게 했던 것이다.

요즘 5형의 형벌을 시행한다면 도덕과 윤리가 살아 있고 질서가 존재할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기우일까. 망상은 이런 사실이 있어 생각게 된다.

조선조 순조 때 궁녀이던 희봉(喜鳳)은 평일에 근신하지 않는 다는 죄목으로 진도 금갑도로 유배시켰다. 이런 죄목을 요즘 적용한다면 유배가지 않을 자가 얼마나 될 가 허망해진다. 그러나 우리고장으로 유배 온 관료출신이나 선비들은 그런 차원이 아니었다. 그 수자가 무려 40여명에 이른다는 것을 알게 되니 놀랍다.

최근까지 호남지역으로 유배 온 실상을 조사해 기록한「호남유배인 기초목록」에 의하면 광양으로 유배 온 자가 27명으로 수록돼 있고, 김미정이 조사한 명단에 모두 포함돼 있다.

그런데 그보다 13명이나 더 많은 숫자이고 광양에서도 다압면에 집중돼 있다니 신통하지 않을 수 가 없다. 뿐만 아니라 김성탁은 제주에서 이배와 다압면 용선암 인근에 거주했으며 이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는 후학을 양성했고, 생활 일기까지 기록해 남겼다. 이것을 발굴해 그 자손에게 알려주고 그 원본을 보내 해제 본을 만들게 해 받아 보관하고 있다. 이 일기를 보니 유배 자가 어떤 일을 했고 어떻게 생활했는지를 상세하게 알 수 있다.

유배자 발굴에 신통력을 발휘한 사람은 우리고장 출신이며 광양에 거주하는 아동문학가이다. 그는 이 일 뿐만이 아리나 우리가 지금까지 미처 찾지 못했던 감무 1명과 현감 7명을 찾았으며 지금도 멈추지 않고 계속 작업을 한다하니 신통하고 감사할 뿐이다.

그런데 역사에 유일하게 동물인 코끼리가 첫 번째 유배 온 곳은 우리고을이었던 것이다. 조선조 개국때 기념으로 일본에서 보내온 코끼리였다. 대신들은 반환의 목소리를 냈으나 중신이던 김종직이 예의에 벗어나는 것이라 받아줄 것을 건의해 두게 된 것이다. 이 진상품이 광양으로 유배 왔으니 명단에 포함돼야 할 것이라 했더니 사료적 가치는 인정할 수 있다는 공감을 표시해 웃음을 자아냈다. 

언급한 바와 같이 현재 조사해 기록된 것은 호남과 제주를 합해 9백여 명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광양의 경우처럼 전수조사가 된다면 전남만 1천여 명이상이 될 것으로 추산된다. 현재 최대의 기록숫자는 신안으로 160명에 이르고 있으며 제주도 또한 비슷하다.

이 발굴 작업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전문가들이 해도 고난도의 일이기 때문에 발굴된 자료는 소중하게 관리해야 할 것이다.

또한 역사자료이고 사료적가치가 매우 크기 때문이고 남의 지적재산을 본인의 승인 없이 함부로 활용한다면 지탄을 받게 될 것이며 관계기관은 물론 우리시에서는 특별조치가 있어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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