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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양뉴스
  • 승인 2018.08.17 19:11
  • 호수 7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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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태 광양문화원 부원장

삶과 죽음

 

내가 죽음을 깊이 생각하게 된 동기는 중국 역사학자 사마천의“죽음은 사람에 따라 태산처럼 무거울 수도 있고 깃털처럼 가벼울 수도 있다”는 죽음의 상반된 인식에 대한 흥미 때문으로 기억된다.

수명의 연장이 축복이라 이야기하면서도 5060세대들이 양가부모가 없는 것을 오복보다 위에 둔다는 말이 회자되고 있다고 한다.

얼마나 오래 사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자식들에게 부담 주지 않고 최소한의 고통과 두려움 속에 마지막 자존을 지키며 죽음을 맞고 싶어 하는 소위‘죽음 복’을 이야기하는 이들도 많다.

존엄사를 넘어 모질게 자살은 차마 못해도 오는 죽음 굳이 마다하지 않겠다며 정기건강검진을 받지 않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는 말도 들린다.

오고야 마는 죽음 구태여 들추어“가렵지 않은 곳은 긁지 말아라!”는 주장도 있고,“하루 다섯 번 죽음을 사색하면 행복해진다”는 말도 전해온다.

프랑스의 작가 라로슈코프는“태양이나 죽음은 너무 눈이 부셔 똑바로 쳐다볼 수 없다”고 말했다.

생각할수록 난해하고 힘에 벅찬 주제를 꺼낸 것은 최근 책을 뒤져 찾은“사람이란 존재가 무엇인지 느끼는 만큼 수월하게 죽어간다”는 말에 생각이 멈추고,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삶의 의미를 일깨워 줌으로써 삶을 최선을 다해 살도록 한다”는 말도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까짓 죽음 끌려가지 않고 당당히 찾아가 보자고 객기한번 부려보면 어떨까? 할아버지 갈키 나무하던 타박 솔 황토고갯길을 할머니 지팡이 짓고 황혼 역 시집간 딸 집 찾아가듯 우리도 한번 편안히 삶과 죽음의 길을 음미해보자.

“저승이란 참 좋은 곳인 것 같다. 아무도 한번가면 돌아오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다.

죽은 후 돌아오는 이 없으니 죽음은 곧 살아있는 사람들의 해석이고 이야기일 것이다. 이는 죽음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요한 대목이기도 하다.

태고이래로 인간은 온갖 위험과 공포를 마주하며 큰 바위·나무·하늘 등을 향해 안전을 기원하였고 살아가는 기후·환경·관습에 맞는 나름의 신을 생각해내고 죽음마저 구원의 대상으로 인식하고 의존하게 되었다.

일부 부족들은 부활과 영생이 인간의 노력에 의해 가능하다고 믿기에 이른다. 그러나 조선시대 김소행은 <삼한습유>에서“환상이 극에 달하면 믿음이 되고 믿음이 극에 달하면 신(神)이 된다”며 이를 경계하였다.

서양에서도 맹목적인 믿음 보다는 인간의 능동적 지성만이 신을 올바르게 인식할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한다. 여기서 부활과 영생이라는 인간의 과욕이 빚은 과오에 대해 잠깐 역사를 통해 살펴보자.

이집트는 세계 4대 문명의 발상지 중 하나로 나일 강을 중심으로 한때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다. 그러나 부활이라는 헛된 욕망에 눈이 멀어 그 많은 지혜와 국력을 스핑크스와 피라미드 및 신전건설에 쏟아 부었다.

만일 나일 강의 치수에 힘써 가장 이상적인 경제구조를 찾고 백성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데 힘썼다면 그 많은 파라오들은 미라라는 흉물이 아니라 백성의 마음과 역사 속에서 영생을 이어올 수 있었을 것이며 그리스나 로마에게 지중해의 주인자리를 내주지도 않았을 것이다.

중국의 역사에서 마오쩌둥과 더불어 가장 큰 영향을 미친 한 사람으로 평가받는 진나라 시황제 는 13세에 왕의 자리에 오른 후 남다른 지혜로 법치와 제도의 정비 등 부국강병에 힘써 강력한 왕권을 확립하고 39세에 중국천하를 통일하여 역사상 처음으로 황제의 칭호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나라는 물론 스스로 불로불사를 염원하고 만리장성·아방궁·병마용을 건설하며, 영약과 불로초를 찾는데 혈안이 되면서부터 소위 분서갱유(焚書坑儒:서적을 불태우고 유학자를 생매장한 일)에 이르는 등, 국력이 급격히 쇠퇴하여 황제 스스로도 50살에 객사를 하고 통일 진나라도 그가 죽은 후 4년 만에 멸망하게 된다.

일본의 한 학자는“생명이 길어질수록 수치도 많아진다며 마흔 살이 되기 전에 죽는다면 다행 일뿐”이라는 말을 했고, 반면 중국의 속담에는“생명이 길어지면 봉래(선인이 산다는 불로불사의 땅: 좋은 일)를 만난다”는 등 삶과 죽음에는 자주 상반된 말들이 서로의 주장을 편다.

나이가 들면 어린아이로 돌아간다고들 한다. 종교가 아니더라도 삶에는 우리의 생각과 판단을 넘어서는, 어린아이의 순진무구한 웃음 같은‘그저 존재함’이라는 편안한 공간이 있는 것 같다.

쾌락과 고통, 좋고 싫음, 미움과 고마움, 심지어는 생명에 대한 경애와 죽음에 대한 공포까지도 그 경계가 낮아지다 마침내는 사라지며 하나가 되는 그런 세계이다.

독서광인 정혜윤은“거의 전적으로 아는바가 없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것이 삶에 작별을 고하는 가장 행복한 방법”이라며 다른 방법으로 같은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서늘 참에 밭을 찾으니 매실과 감나무들이 가지가 째지도록 제 몸뚱이 생각하지 않고 열매를 품고 있다.“생명의 유한함까지 넘어서는 초월의 가능성이 자연에 있다”더니 이 또한 그런 모습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