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의 향기-지금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
생활의 향기-지금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
  • 광양뉴스
  • 승인 2018.11.09 18:57
  • 호수 7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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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미경-한국문인협회 광양시지부장

결혼식이 끝나고 단칸 사글세방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을 때 우리에게 남겨진 것은 140만원이라는

빚뿐이었다. 포항제철 주택단지의 13평 아파트 값이 110만원 할 때였다. 나는 어떻게 하더라도 빚을 갚고, 내 집을 마련하겠다는 다부진 꿈을 꾸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허리띠를 졸라매는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세금을 떼고 나면 20만원도 안 되는 남편의 월급에서 15만원씩 적금을 넣었다. 3개월에 한 번씩 나오는 보너스도 전액 통장으로 들어갔다. 한 달 동안 살아야 할 생활비는 3만원도 채 되지 않았지만 남편과 나는 13평 아파트의 주인이 될 꿈을 키우며 설레었다. 그 때 남편의 비상금은 천 원이었는데, 월급날이 올 때까지 지갑 속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내 비상금인 220원도 쓸 일이 없었다. 그 당시 시내버스 값은 110원이었고, 버스 탈 일이 생길 것을 대비해 놓은 것이었다. 가계부 지출 란에는 한 달 부식비가 3천원을 넘지 않았다.

나는 그 생활이 불행하다고 여겨지지 않았다. 매달 불어나는 통장의 금액을 보면서, 일 년 내내 슬리퍼만 신고 다녀도 궁색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월급날까지 고스란히 남아 있는 1220원을 돼지 저금통에 넣을 때는 또 한 달을 잘 견뎌냈다는 만족감에 스스로가 대견했다. 지금도 나는 돼지 저금통 속으로 떨어지던 그 동전의 울림을 잊지 못한다. 그 속으로 피어올랐던 설레는 꿈의 향내도 남김없이 다 기억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의 꿈과 희망이 피어나는 소리였고, 행복한 미래를 예고해주는 약속의 울림이었다.

결혼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 있었던 그 일은 지금도 심장을 뛰게 만든다. 남편과 나는 포항 시내에 있는 언니 집에 갔다가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여름이었고 날씨는 후덥지근했다. 나는 남편에게 버스를 타지 말고 아이스크림을 사 먹자고 했다. 그 때 아이스크림 값이 50 원이었는데 두 개를 사 먹어도 120원이 남았다. 집까지 걸어가려면 한 시간이 넘는 거리였지만, 우리는 아이스크림을 사먹자는데 의견을 모았다.

남편과 나는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밤하늘을 따라갔다. 별들이 쏟아지고 있었고, 구름 사이로 지나가던 눈부신 달빛이 심장을 타고 흘러들어왔다. 아이스크림을 넣은 우리의 입안에서는 작은 연인들의 멜로디가 피어올랐다. 세상에 부러운 것이 없었다. 통장의 금액은 매달 불어날 것이고, 머지않아 내 집도 마련할 것이다. 우리는 달콤한 아이스크림 맛에 젖고, 감미로운 노래에 취해 달빛이 기울어가는 줄도 몰랐다.

그 때 갑자기 통금 사이렌이 고막을 때렸다. 깜짝 놀란 남편과 나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마주쳐다보았다. 사방에서 후다닥 후다닥 뛰어가는 발자국소리들이 어지럽게 달려왔다. 호루라기 소리가 밤공기를 불안하게 갈라놓았다. 여름밤에 취해 통행금지 시간도 잊어버린 것이었다. 남편과 나는 마지막 남은 아이스크림을 입안에 구겨 넣고 뛰었다. 그런데 몇 발자국 못가서 내 슬리퍼 한 짝이 벗겨져 나뒹굴었다. 나는 얼른 슬리퍼를 줍고 나머지 한 짝도 벗어서 손에 쥐고 뛰었다. 경찰이 호루라기를 불며 따라왔다. 남편과 나는 젖 먹던 힘까지 내어 달리고 또 달렸다. 그러다보니 어느 새 집이 보였다. 따라오다 지쳤는지 경찰은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숨을 몰아쉬었다. 잡혀서 통금이 해제될 때까지 유치장에 갇히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라며 배를 잡고 웃었다. 그 순간을 생각하면 나는 지금도 숨이 턱밑까지 차오르고 알알한 통증과 그리움을 동시에 느낀다. 그런 순간들이 있었기에 그토록 힘겨워 허덕이면서도 오늘까지 잘 견뎌왔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결혼한 지 26개월 뒤에 우리는 640만원으로 껑충 뛰어버린 13평 아파트를 340만원이나 빚을 내어 장만했다. 그것을 2년 만에 갚았고, 나는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허리띠를 졸라매는 생활은 계속되었고, 큰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 할 때도 나는 새 신을 사 주지 못했다. 그런 생활을 10년 동안 했다. 그러다가 내가 일을 하게 되면서 수입이 생기게 되었다. 나는 그 동안 아이들에게 못 사 준 것들이 마음에 걸려 허리띠를 있는 대로 풀었다. 저축은 적당히 하고 그동안 못 다한 것들을 원 없이 했다. 집안으로 들어왔던 새 물건들이 얼마 되지 않아 밖으로 나가고 새로운 물건들로 채워지기를 반복했다. 버스 타는 것도 망설였던 나는 새 승용차도 몇 번씩 바꾸었다. 그렇게 26년을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은 정년퇴직을 하고 영원할 것 같았던 나의 일거리도 더 이상 함께 있기를 거부했다. 돌아보니 남은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26년 동안 내가 한 것이라고는 손에 들어온 돈을 다 쏟아버린 것이었다. 아이들의 마음도 내 몫으로 가지지 못했다. 늘 시간에 쫓기는 엄마를 아이들은 기다려주지 않았다. 어느 새 엄마 품을 떠나 성인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그런데 지난 토요일 남편마저 갑자기 당진으로 떠나버렸다. 제철소가 있는 그 곳에 일자리가 생긴 것이었다. 처음에는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에 반가웠지만 갑자기 막막해져 왔다. 혼자서 지내야 한다는 것이 더없이 큰 불안감으로 달려왔다. 가족을 위해 먼 곳까지 간 남편에게 미안해서 눈물이 나기도 했다.

내가 좀 더 절약하고 재테크에 눈이 떴다면 그 먼 곳으로 일하러 가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저려왔다. 나의 무능력이 부끄러워지고 돈 쓰는 것이 무서워졌다.

시장에 갈 일이 생겨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차의 연료 계기판 눈금이 내려갈 때마다 심장도 함께 녹아내린다. 지금 상황을 어떻게 극복할지 잠을 설치면서 생각했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남편이 일하는 동안 다시 허리띠를 졸라매야겠다고. 지금 내가 벌여 놓은 일들을 줄이고, 남은 시간은 남편이 있는 곳으로 가서 함께 시간을 보내자고. 당진은 서울과 가까우니 아이들과 만날 수 있는 기회도 많으니 행복한 시간들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우리 가족이 서로의 마음을 하나로 엮을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될 것이다.

남편과 나는 서로 사랑해서 결혼을 했다. 기타를 치며 로망스를 들려주었던 남편의 20대를 나는 고스란히 기억 속에 담고 있다. 그것을 36년 동안 잊고 살았을 뿐이다. 이젠 그 시간들을 되찾고 싶다.

요즘 나는 새로운 계획에 들뜨고 있다. 곧 12월이 올 것이고, 남편이 있는 그 곳에는 여기서는 좀처럼 보기 어려운 눈이 내릴 것이다.

나는 지난 겨울 딸이 사 준 검은색 롱코트를 입고 목화송이 같은 흰 눈을 맞으며 남편을 만나러 갈 것이다. 열차를 타고 몇 시간쯤 달리다 어느 간이역에 내리면 남편은 그런 나를 마중 나와 기다릴 것이다.

우리의 삶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다. 절망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희망과 새로운 빛의 세계로 인도하는 기회라는 것을 깨달을 때가 많다. 50원짜리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깔깔거리며 웃었던 20대의 나는, 5천 원짜리 커피를 마시면서도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60대가 되었다. 그것을 보면 행복과 돈은 결코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지금 내게 가장 소중한 것은 간절히 원하던 꿈을 이룬 것도 아니고, 아직도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 많아서 일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사랑하는 우리 가족들이 함께 모여 목젖이 보이도록 웃으면서 행복한 눈으로 서로를 마주보는 것이다. 그 시간들을 꿈꾸는 이 순간이 나는 참으로 행복하다. 세상 그 어느 것보다 소중하고 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