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혀있는 광양의 독립운동 ③ 광양의 3.1만세 운동
묻혀있는 광양의 독립운동 ③ 광양의 3.1만세 운동
  • 김영신 기자
  • 승인 2019.01.31 16:23
  • 호수 7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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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양 첫 만세운동…1919년 3월 27일 광양 장날 옥룡 출신 유생 정성련, 태극기 흔들며 만세 불러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지역에서도 광양의 3.1운동 다시 알기 움직임이 일고 있다.

후대에 알려지지 않고 묻힐 뻔 한 진상출신 황병욱 선생과 1927년 경남 하동에서 제2의 3.1운동을 주도했던 태인동 출신 최한원, 최백근, 최영근, 김태수와 진상 출신 김무일 등 애국지사들의 이름과 활약상이 알려지고 있다.

이 가운데 광양의 한 단체가 오는 4월1일, 5일장에서 광양의 3.1운동을 재연하는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린다.

광양신문은 지역신문의 역할을 다하고자 광양의 3.1운동 역사를 돌아보고 독립유공자에 추서되지 않았지만 광양의 독립운동에 참여한 인물들을 찾아 내 독자와 시민들에게 알리고자 한다. <편집자 주>

 

△ 광양교육지원청 앞에 세워져있는 오의사 3.1운동 기념비.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전승국의 식민지에서 최초로 일어난 대규모 항일독립운동인 3.1독립만세운동은 1919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저항한 일제 강점기 최대 규모의 민족독립운동이었다.

3.1독립만세운동은 민족종교인 천도교의 대표 손병희 등에 의해 주도됐으며, 1919년 3월 1일 서울 태화관에서 민족대표들이 모인 가운데 만해 한용운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탑골공원에 모인 4~5천명의 학생들이‘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서울에서 시작, 천안(아우내 장터), 군산,광주 등 전국으로 번져갔다. 전남의 만세운동은 광주와 목포에서는 주로 기독교도가 주도 했고 나머지 지역에서는 학생, 서당 생도가 주도적으로 움직였다.

광양에 독립선언서가 전달된 것은 3월 3일, 전희로에 의해 순천군을 거쳐 전달됐다는 기록이다.(시지에는 김희로로 나와있다.) 지역의 유지들 간 운동에 대한 움직임은 이미 있었지만 광양 만세운동이 수면으로 떠오른 건 3월 27일(음력 2월 26일)부터 였다.

옥룡출신 유생 정성련(鄭星鍊)이 자택에서 만든 태극기 3본을 들고 나와 오후 3시경, 사람들이 모인 광양장에서 장대에 매어 높이 들고 휘두르며‘만세 만세! 대한독립만세!'를 외치자 군중들이 모두 한마음으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정성련은 순찰 돌던 헌병에 의해 현장에서 붙잡혔다. 정성련 의사의 만세운동을 시작으로 장날이던 4월 1일(음력 3월 1일) 광양읍에서 또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3월 27일 만세운동으로 인해 광양의 인심은 한층 긴장했고 청년과 지사들은 비밀연락을 취해가며 재거(再擧)를 계획하게 되었다.

그 중 김영호, 박용수, 김석용 등은 3월 29일에 이재갑의 집에 모여‘4월 1일 장날을 기해 크게 만세운동을 할 것을 결의’하고‘대한독립만세’,‘대한독립회복호창 억만세’등의 문구를 써넣은 종이 태극기를 만들었다.

△ 오의사 중 한사람인 서경식 판결문.

또‘독립만세를 부르기 위해 4월 1일 유지자는 성내로 속히오라! 만일 오지 않는 자가 있으면 집에 불을 지를 것이다’,‘본 군민은 전부 내림하라! 광양유지청년’등의 과격한 문구를 적은 전단을 작성하고 김태훈, 김태성, 김행진, 박용완 등에게 각 요소요소에 붙이도록 했으나 사전에 발각,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서경식은 4월 1일 김만두의 집에서 여동기를 시켜 백지에 조선독립만세라고 쓴 태극기를 만들게 하여 몸에 지니고 박용래, 정귀인 등과 함께 읍내리 앞길에서 태극기를 높이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연거푸 외쳤다.

서경식이 만세 선창에 이어 1천여명의 군중을 항해 일제의 침략행위를 규탄하고 모두가 독립운동에 궐기할 것을 촉구하는 연설을 하자 군중들은 환호했다.

일제는 헌병과 기마대를 풀어 군중을 해산시키고 이들을 붙잡았다. 서경식은 끌려가면서도 독립만세를 불렀고 이중 정용현은 “내 목은 끊을 수 있어도 내 마음은 굽히지 못한다”고 일제를 향해 호통을 쳤다.

수백 장의 태극기를 군중들에게 나눠주며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는 등 광양지역에서의 독립운동을 주도적으로 펼친 김상후는 운동이 끝난 후에도 불법 검문과 신체수색을 자행하는 일제 헌병들에게“무고로 인민을 붙들어다가 신체검사를 하는 것은 불법”이라고 항변했고 “일본과 조선은 전연 다른 것으로서 동일시 될 수 없다. 조선은 개국 이래로 독특한 역사를 가지고 내려온 것이니 이번에 민족자결과 조선독립을 주장해 독립만세를 부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냐”며 30여명의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공공연히 만세운동의 정당성을 말하다가 체포되어 8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다음호에 계속-

정리=김영신 기자

 

*이 내용은 공훈전자사료관, 국가기록원, 광양시지 등의 자료에서 발췌해 정리했음을 일러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