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냄비를 내 던지고’
‘뜨거운 냄비를 내 던지고’
  • 광양뉴스
  • 승인 2019.03.29 17:40
  • 호수 80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독자에세이
김선규 시인

 

며칠 바람 좀 쐬면서 쉬었으면 하는 마음이 드는 건 푸념인가 희망사항인가!

다 내려놓고 어디론가 홀연히 떠나고 싶은 마음은 희망사항인가 푸념인가!

보이지 않는 내일의 불안감 때문일까 아니면 너무 달려서 지쳐서일까

나이를 먹을수록 쉬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하다.

“쉬려면 내려놓아야 할 게 한 두 가지가 아닌데…”

쉽게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는 이유를 쏟아내며 현실과 타협을 시도하고 있다.

아는 것, 모르는 것, 잘난 것, 못난 것을 포기하기가 밥숟가락 놓기(죽음) 보다 어렵다.

어느 날, 때를 놓쳐 시장기가 돌아 급하게 라면을 끓여 식탁으로 옮기다 냄비를 놓치고 말았다.

펄펄 끓는 냄비를 얇은 수건으로 감싸고 손으로 들었다가 나도 모르게 내동댕이를 친 것이다.

“앗! 뜨거워”란 비명소리가 채 끝나기도 전에 냄비가 손에서 빠져나가더니 갈 길을 잃고 바닥에 나뒹굴었다.

사방으로 흩어져버린 면발을 보며 길 잃은 고양이처럼 한 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나는 왜 냄비를 던졌을까?, 그러면, 그 순간에 안 던지고 버티면 사람이냐! 그런 걸 본능이라고 그러는 거야! 살고자 하는 본능, 전문용어로‘동물적 본능’이라고 하지”허탈한 마음에 혼자 묻고 혼자 대답 했다.

상처 입지 않으려고 의식이 지배하기 전 무의식이 먼저 나서 필사적으로 몸부림을 친 것이다.

분명한 건 배고픔을 잊어버린 이성 보다 다치지 말아야겠다는 경험적 판단이 앞선 것이다.

그렇다.

내려놓았다는 것은 지금 내가 상처입지 않기 위해 움직여야 하는 순수한 행동이다.

계산을 하고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몸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다.

답답해서 가슴이 찢어질 것 같거든, 힘들어서 몸이 무너질 것 같거든 가방을 챙길 필요도, 누울 곳을 걱정할 필요도, 뭘 먹을지 고민도 하지 말자.

일단은 집 앞 가까운 까페에서 허브차를 마시고, 이제 막 푸릇푸릇 돋아나는 풀 향이 뿜어져 나오는 뒷산의 둘레길을 걸어도 보고, 팝콘과 음료수를 들고 영화관 구석진 곳으로 가자.

그런 다음 파도가 출렁이는 바닷가 바위에 앉아 바람 맞으며 시집도 펼쳐보자.

가슴속 냄비가 더 뜨거워지기 전에 손가락을 하나씩 놔주는 연습을 해보자.

 

<본능>

길을 잃고서야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길을 잃고서야

바람을 보았습니다.

길을 잃고서야

길을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