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한 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오직 한 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 김영신 기자
  • 승인 2019.10.04 18:18
  • 호수 82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백범 김구 기념관...김구의 삶과 사상
격동의 대한민국 근현대사와 마주 하는 곳

2019년이 두 달 여밖에 남지 남았다. 빠르게 지나가는 시간 속에서 차츰 잊혀져가는 것들이 많은 것이 우리 일상의 현주소다. 그래서일까? 2019년이 시작할 무렵 3.1운동 100주년이라며 고무됐던 사회분위기가 차츰 식어가는 것도 같아 환기가 필요한 시점이다. 다른 것들은 시간 속에 묻힌다 해도 오늘을 사는 한 역사를 기억하는 일을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 더구나 그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서 살신성인으로 나라를 지켜 온 선열들의 은혜는 더욱 그렇다.

최근 검찰개혁을 외치는 국민들의 열망이 다시 촛불민심으로 타오르고 있는 가운데 3.1운동 100주년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새기고 나라를 지켜 온 선열들에 대한 감사함을 돌아보고자 서울 효창공원 백범기념관을 찾았다. <편집자주>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强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 김구의 <나의 소원>중에서 -

백범 김구 기념관은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 내에 있다.

1만 8,364㎡의 대지에 9,683㎡ 의 지하 1층, 지상 2층 건물로 2002년 10월에 개관했다.

김구의 삶과 사상,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역사와 격동의 대한민국 근현대사를 마주하는 곳으로 부강한 나라보다는 ‘높은 문화의 힘’을 갖고 싶어 했던 선생의 염원을 읽을 수 있는 곳이다.

김구 기념관이 있는 자리는 원래 조선 정조대왕의 맏아들 문효세자와 함께 정조의 후궁이자 문효세자의 생모인 의빈 성씨, 순조의 후궁 숙의 박씨 그리고 숙의 박씨의 딸 영온 옹주의 무덤들이 있던 곳이었다. 당시에는‘효창원’이라 불렀다.

그러다 1894년 일본군이 청과 전쟁을 하는 동안 효창원 앞에 있던 송림(松林)내에 선혜청의 창고였던 만리창 자리에서 야영을 하면서 숲을 파헤쳤고, 이후 일제는 이 곳에서 숙영을 하며 독립군 토벌과 소탕작전 등을 하는 비밀작전지로 사용했다. 일제는 이곳을‘舊 용산고지’라 불렀다. 문효세자의 묘소는 고양의 서삼릉으로 이전했고 1940년 조선총독부 고시 제 208호에 의해‘효창공원’이 됐다.

백범 김구 기념관이 들어서 있는 효창공원은 이렇게 슬픈 이야기를 안고 있다.

1945년 해방 후 일본군 숙영지는 철거됐고 1946년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등 삼의사의 유해를 효창공원에 모셨으며 김구 선생의 뜻에 따라 이 삼의사 묘소 앞에 유골도 없고 비석도 없는 안중근 의사의 가묘(假墓)를 만들어 놓았다. 먼 타국에 있는 의사의 유해가 수습되면 모셔올 것이라며…

안두희로부터 피살당한 김구 선생도 1949년 7월 이곳에 모셔졌다.

사연 많은 효창공원 한 켠에 자리한 백범기념관 건물 안으로 들어서면 김구 선생의 대형 좌상이 있는 중앙홀이 나온다.(이 대형 좌상의 작가는 의아스럽게도 대한민국 작가가 아닌 중국 작가다) 기념관은 김구 선생의 업적을 크게 교육활동, 독립운동, 의열투쟁, 군사활동, 통일운동 등 5개로 구분, 전시실을 꾸몄다.

2년전 개봉한 영화 대장 김창수를 본 독자들이라면 김구 선생의 이름이 한 개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황해도 해주에서 테어난 김구는 1893년 동학에 입도하면서 이름을‘창수’로 바꾸고 아기접주라는 별명을 얻어가며 많은 사람들을 동학에 참여시키는 포교활동을 했고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해주에서 동학농민군을 지휘했다. 1896년 명성왕후를 시해한 일본에 대한 분노를 이기지 못해 황해 치하포 나루에서 일본군 중위를 죽이고 인천형무소에 수감, 사형을 언도받았으나 국모의 원수를 갚았다는 죄목에 고종의 사형집행정지 명령으로 사형을 면했다. 옥에서 탈출한 김구는 도피생활을 하던 중 충남 공주 마곡사에서‘원종’이라는 법명으로 승려생활을 하기도 했다.

1905년 을사조약 반대시위 집회를 주도했고 1911년 안악사건과 양기탁보안법사건으로 4년 8개월간의 옥고를 치렀다. 김구는 옥중에서 독립에 대한 의지를 더욱 불태웠고 일제의 호적에서 이탈한다는 뜻의 이름 九로, 백정과 범부도 애국심이 자신만큼 강하기를 바란다는 뜻의‘白凡으로 호를 지었다. 김구는 교육활동과 농촌계몽활동을 활발히 펼치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상해로 망명, 임시정부활동에 참가했다. 그동안의 활동에서 지도자로서의 면모를 갖춘 김구는 1919년부터 1945년까지 상해임시정부 활동을 했다. 1942년 7월에는 조선의용군대가 광복군에 편입하는 등 좌우연합정부를 구성해 좌우익세력의 통합을 이루고자 했다.

일생이 조국의 자주 독립운동으로 점철된 김구 선생은 해방이후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남북 신탁통치가 발표되자 반탁시민대회를 개최하는 등 조국의 자주독립을 위해 온힘을 다했다.

일요일이던 지난달 29일,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아이들이 삼삼오오 무리를 이루고 위인전 속 인물을 기념하는 기념관을 돌아보며 선생님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거리기도 하고 무언가를 열심히 적기도 했다.

김구 기념관은 김구의 삶과 사상 뿐 만 아니라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아픈 역사를 한 번에 읽을 수 있는 역사의 산 교육장이 되고 있다.

단재 신채호는“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고 했다.

개인의 지나온 시간이 현재의 거울이 되듯 나라도 마찬가지다. 침략전쟁의 역사, 수탈의 역사를 거쳐 오면서도 지금 이렇게 대한민국이 존재하는 것은 김구, 안중근, 이봉창, 백정기, 이동녕, 조성환, 차이석 등 효창공원에 묻혀있는 독립운동가와 전국 각지에서 독립을 외치며 스러져 간 수많은 선열들의 희생 때문이다.

3.1운동 100주년은 기념하는데서만 그치고 마는 것이 아니라‘애국’그 올곧은 정신이 우리세대, 다음세대에 까지 이어질 수 있는 하나의 유전자로 뿌리내려야 한다.

국가보훈처가 정한 이달의 독립운동가는 안중근(1879~1910)의사다. 국가보훈처가 매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를 정해 기리는 것도 목숨을 草芥처럼 버리고 나라를 지켜 온 애국선열들을 기억하자는 뜻에서 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