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의 향기] 잘 살고 잘 죽기
[생활의 향기] 잘 살고 잘 죽기
  • 광양뉴스
  • 승인 2019.12.20 18:57
  • 호수 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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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미경 한국문인협회 광양시지부장

영혼불멸설을 주장한 플라톤은 사람은 잘 살고 잘 죽어야 한다고 말했다. 사람에게는 영혼이 있으며 살았던 행적에 따라 죽은 뒤 영혼에게 상과 벌이 가해지고, 그것에 따라 좋은 사람으로 태어날 수 있고, 흉측한 짐승으로도 태어날 수 있다고 했다. 그럼 잘 살고 잘 죽는 것이란 무엇인가.

플라톤은 인간이 욕망과 욕구를 버리고 살아가기를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는 올바른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우치게 만든다.

하지만 인간의 삶은 플라톤이 바라는 것처럼 되고 있지 않다.『국가』1권에서 올바르지 못한 사람이 훨씬 더 잘 산다며 역설(逆說)했던 트라시마코스의 말처럼 여전히 올바르지 못한 사람이 더 잘 살고 있다.

플라톤이 살았던 2500년 전이나 현재나 조금도 다를 바가 없는 인간의 모습에서, 진정으로 올바르게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은 힘이 빠지게 된다.

자신보다 나약하다는 이유로 시궁창 속으로 밀어 넣고도 그 앞에서 승리의 웃음소리를 날리는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지 못한다.

그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그 거짓을 진실로 믿고, 함께 덩달아 날뛰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우리는 올바른 삶을 지향해야 한다. 심장을 도려내어 사람들이 모여 있는 광장에 내던지고 싶을 정도로 억울하고 분해도, 올곧은 삶의 자세를 무너뜨려서는 안 된다.

죽음 앞에서도 너무나 당당했던 소크라테스처럼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아야 한다.

올바르게 살았던 사람들과 올바르게 살지 못한 사람들이 죽음을 맞이했을 때 각자에게 맞는 처벌과 보상을 받는다는 것이 플라톤의 주장이다.

부당함을 당하면서도 올바르게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에겐 그런 사후의 상벌 문제는 많은 힘이 된다. 그래서 억울하고 속이 상해도 자신을 지키면서 성실하게 열심히 살아간다.

삶에 대한 상벌은 혼이 육체를 떠난 뒤 반드시 받는다는 믿음을 가진 채 말이다.

영혼이 있든 없든 우리는 잘 살고 잘 죽어야 한다. 플라톤은 내세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인간이 죽고 나서 다시 살아온다는 것을 아무도 주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을 비롯하며 수많은 학자들이 인간의 영혼을 증명하고, 부활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가설일 뿐이다.

죽은 뒤의 인간은 어떻게 되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영혼이 없다면 죽는 순간 모든 것은 끝이 난다.

그렇다면 현재는 단 한 번뿐인 삶이 된다. 그 삶을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당연히 잘 살아야 한다. 다시는 오지 않을 귀한 삶이기 때문에 더없이 소중하게 가꾸고 다듬어야 한다.

죽는 그 순간 난 정말 잘 살았노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도록 아름답게 가꾸어야 한다.

플라톤은『제 7서한』의 시작과 끝을 eu prattein(안녕)로 나타내고 있다.『국가』의 마지막 문장도 eu prattein으로 끝맺고 있다.

방대한『국가』1~10권까지를 통틀어 한 마디로 정리한다면 eu zen 즉 to live well(잘 산다는 것)이다. 그만큼 플라톤이 강조하는 것은 잘 살고 잘 죽는 것이다.

『국가』를 통해서 우리는 영혼의 불멸성을 믿으며, 육체를 떠난 영혼이 사후 세계에서 현세의 삶에 대한 충분한 보상을 받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용기를 내게 된다.

현실이 비록 힘들어도, 올바름이란 과연 무엇인지를 묻고 스스로 깨달으면서 진정으로 올바르게 사는 길을 다시 한 번 모색하게 되는 것이다.

플라톤의 말은 결국 육체는 죽어도 혼은 죽지 않고 새로운 육체 속으로 들어가 또 다른 삶을 이어간다는 것이다. 그러면 인간은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 된다. 죽은 혼이 상벌을 받게 된다는 것은, 인간은 올바른 삶을 살아야 하고 또한 잘 죽어야 훌륭한 존재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영혼과 육체는 하나의 동일한 인간의 존재(esse)를 공유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존재가 육체에게 주어지는 것은 영혼에 의해서이고, 육체가 제거되어도 영혼은 여전히 남는다고 토마스 아퀴나스는 말했다.

또한 그는 영혼은 그 자체로서는 존재할 수는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체로서 종에 속하는 것은 아니며 영혼은 종의 부분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프로이드 또한‘정신분석’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냄으로써 영혼들이 우리의 삶에서 해내는 역할을 강조하였다.

정말 영혼이란 있는 것일까. 죽으면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고, 육체는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또다시 새로운 육체 속으로 들어가 거듭 태어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제기 되어 왔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럼 영혼이란 무엇인가. 어디에 존재하고 있는가. 플라톤은 몸이라는 감옥에 영혼이 갇혀 있다고 생각했으며, 죽음으로 인해서 혼이 육체로부터 해방된다고 했다. 결국 영혼을 논하기 위해서는 죽음과의 관계를 피할 수 없게 된다.

우리는 언제 죽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죽음을 맞이한다는 사실과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느냐가 더 중요한 문제임을 인식해야 한다.

죽음에 직면하여 죽음을 대하는 태도에는 수많은 방법들이 있다. 하지만 그런 죽음이 실제로 우리 앞에서는 어떤 모습으로 펼쳐질 지는 죽음을 경험할 때까지는 결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는 모두 스스로가 판단하고 행동하여야 한다.

죽기 직전 영혼의 상태가 세상에 대한 미련을 다 버릴 정도로 철저하게 비판적이라면 그는 죽음이나 사후세계에 대한 두려움 없이 잘 죽을 수 있다.

다 버리고 철저하게 절망하면서 산다면 사후 영원의 세계에 동참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플라톤은 인간이 육체의 욕망에서 벗어나 영혼이 주인이 되는 삶을 살기를 바라고 있다. 육체의 지배를 받지 않는 영혼이 주인이 되어 사는 삶이란 바로 지혜를 사랑하는 철학자의 삶인 것이다.

진정한 철학자의 삶은 그 누가 흔들어도 꿈쩍도 않는 바위 같은 단단한 삶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제는 알고 있는 것에서 그칠 것이 아니라 실천으로 옮길 때이다. 그것은 바로 아름다운 죽음으로 가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