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방지축 귀농 일기[28] 호박 풀때죽
천방지축 귀농 일기[28] 호박 풀때죽
  • 광양뉴스
  • 승인 2020.02.07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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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식 시민기자
이우식 시민기자

수은주의 눈금이 내려가는 계절이 되면 생각나는 음식이 있다.

강낭콩과 여러가지 잡곡, 쌀가루를 풀어서 만드는‘호박죽’우리 지역(광양)에서는‘호박 풀때죽’이라고 한다.

막 끓였을 때도 맛있지만, 장독 위에서 별빛을 받으며‘묵’처럼 굳어지면 또 다른 맛이 있다.

날이 밝아 오기 전, 고양이 걸음으로 접근해 별빛이 뿌려져 맛이 배가된 호박 풀때죽을 떠먹을 때마다 숟가락 자국이 선명하게 남는다.

증거 인멸을 할 수 없게 하는 그 숟가락 자국이 왜 그리 원망스러웠는지 모른다.

고방(창고)에 보관돼 있는 커다란 맷돌 호박을 꺼내 내 앞에 툭 던지며“껍질 좀 벳기라 잉”

어머니의 명령이 떨어지면 호박죽을 먹는 날이다.

숟가락으로 박박 소리가 나도록 껍질을 벗기는 일은 언제나 나의 몫이었다.

골이 깊게 패인 호박이라도 만나는 날이면 팔목의 힘은 배가 된다.

숟가락을 쥔 손이 얼얼해 지도록 열심히 하는데도 속도는 한없이 느려진다.

노오란 속살이 완전히 드러나면, 어머니의 익숙한 손놀림으로 해체 작업이 이루어진다.

적당한 크기로 자를 때 나오는‘호박씨’는 소쿠리에 담아 한긋진 장소에서 건조를 시킨다. 이듬해 종자로 쓰기 위함이다.

빼들하게 말라가는 호박씨를 어머니 몰래 한 줌씩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까먹었던 맛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지난 가을에 수확한 단호박을 냉장고에서 꺼낼 생각을 안 하는 아내를 졸랐다.

“저거 좀 어떻게 해 봐”

벌써 몇번째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는지 모른다.

점심을 거른 채 일을 마치고 집에 왔다. 해가 짧은 겨울엔 늦은 아침으로 점심까지 대신 한다. 두 끼를 먹는 겨울의 저녁밥은 늘 5~6시에 해결한다.

“죽 끓여 놨어, 죽은 안주가 안 될껀디 냉동실에 있는 순대를 쪄 주까?”

매일 술안주를 챙겨야 하는 일상이 못마땅한 듯, 영혼 없이 툭 던지는 말에 가시가 붙어 있다.

“알아서 해”

샤워를 마치고 밥상에 앉았다. 그리운 음식, 추억의 음식이 눈앞에 놓여 있다.

몇년 만이냐.

‘죽’을 죽도록 싫어하는 아내 쪽은 밥이 놓여 있고, 내 앞에만‘호박 풀때죽’이, 어머니께서 만들어 주셨던 그 색깔과 그 냄새를 풍기며 놓여 있다.

달달함도 옛 맛 그대로…

“‘죽’도 안 묵는 사람이 어쩐 일이당가”

“다솜(손녀)이 쪄 주려고 애끼 놨는디 싹 다 썩어불고 쩨깐헌 거 두개만 성헌 것이 있더랑께.‘애끼면 똥된다’는 말이 그른 말은 아닌갑서 잉”

아내의 말 속에서 우리 집 서열을 읽어낼 수가 있다.

내가 외손녀 보다 후순위라는 걸 오늘 알았다.

냉장고에 보관돼 있던 단호박이 외손녀 몫인 걸 모르고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졸라댔으니 얼마나 미웠을까.

아침에 궁시렁 거리기를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

아직도 맷돌 호박 두개는 괜찮은 상태로 보관돼 있다.

봄이 오기 전에 두어번 더 졸라 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