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동학운동사적비 2
[기고] 동학운동사적비 2
  • 광양뉴스
  • 승인 2020.06.12 16:45
  • 호수 8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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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영신 국사편찬위원회 광양시사료조사위원

지난 5월 11일, 동학농민운동 두 번째 기념일이 지나갔다.

최근 정읍 동학기념재단에서 등록된 동학농민군 희생자 수를 발표했다.

전국 각 지역 중 전남을 보면 장흥(385명), 나주(249명), 광양(133명), 함평(98명), 장성(92명) 등 1047명으로 광양시 희생자 수가 전남에서 세 번째로 많은 지역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이는 참여자 등록부에 등재된 희생자 수일 뿐 매천황현 오하기문에 의하면 “1894년 12월 8일 하동관군이 일본군을 인도하여 광양에 들어와 백성들이 살고 있는 집 1000여 채를 불태웠다. 이때 살육과 약탈의 참혹함은 농민군보다 훨씬 심했는데 대개 영남우도 병사들에 의해 자행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기록에서 말해주듯 당시 섬진강을 끼고 있는 다압면을 비롯 월포면, 진하면, 내륙으로는 진상면과 옥곡면에서 어느 지역보다 희생당한 무명용사가 많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바, 동학기념재단에서 밝힌 참여자 등록 수는 십분의 일에 해당하는 수(數)자로 아직도 참여자등록이 안된 무명용사 희생자 수는 800여명으로 추산된다.

광양에서 동학하면 떠오르는 이가 김인배 공(1870-1894)으로 생각된다. 그는 전북 김제시 봉남면 화봉리에서 출생 성장하여 동학에 입도 광양, 순천, 하동, 진주, 경남서부를 주 무대로 영호남대접주로 활동하다가 최후(1894.12)는 광양민보군에게 붙잡혀 유화덕 공(봉강출신)과 광양객사에서 효수되어 삶을 마감한 분이다.

그리고 그는 당시 앞날을 예측하고 함께 활동하던 처남(조씨)에게 이렇게 말했다.

“장부가 사지에서 죽음을 얻는 것은 떳떳한 일이요. 다만 뜻을 이루지 못함이 한이로다. 나는 함께 살고 함께 죽기를 맹세한 동기들과 최후를 같이 할 것이니, 그대는 집으로 가서 부모님을 봉양하라”

당시 25세 열혈청년 김인배 공이 광양에서 남긴 마지막 유언이다.

공의 직계증손 김영중 공(대전)은 광양의 적당한 장소에 증조부사적비를 세운다고 했는데 결국은 못 세우고 치매로 오래 동안 고생하시다가 3년 전에 돌아가셨지만 필자의 생각도 공감하는 바다.

동학에 대한 이글을 올리는 것은 라광집公의 자취도 중요하지만 동학농민운동이 무엇이라는 것, 즉 인간평등실현, 사회부패척결, 외국침략 세력의 처단 등의 대의명분을 실현하기 위해 우리의 선조들이 목숨 걸고 봉기 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 영향은 수 천년 간 이어오는 봉건체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민주화의 발판을 놓음으로서 역사의 큰 물줄기로 이어지는 3.1운동과 4.19혁명, 그리고 5.18광주민주화 운동이 동학농민혁명에서 출발됐다는 것을 이 땅에서 오늘을 사는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는 주문이다.

근자에 충남 예산군 학예사에 따르면 군에서는 10여년 전에 부지를 구입, 동학 농민기념공원을 조성해 군민들의 휴식공간으로 사용해 오던 중 2019년에 위령비 예산으로 5억을 편성해 작년 8월에 착공, 올해 5월 11일 동학농민운동 126주년을 맞이하여 준공식을 가졌다 한다.

우리 지역에서도 주위를 살펴보면 장성군, 함평군 그리고 경남 하동군에서는 등록된 희생자 수가 우리 지역보다 적은데도 희생자들의 영령을 기리는 위령탑이 있거늘 하물며 우리 지역은 무명용사들을 포함하면 1000여명에 이른다 하는데 과연 우리시는 그들을 위해 무엇을 했는가?

그들의 숭고한 추모비하나 없으니 씁쓸하다.

그나마 다행스런 것은 진상 섬거마을 입구에 있는 조그마한 동학정이란 정자가 우리 광양시의 동학을 비추는 대표상징물이 아닌가 싶다.

나아가 이름 없는 무명용사들을 비롯 희생자들의 숭고한 정신을 본받아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세대가 그들의 자취를 배우고 계승하기 위해서는 우리 광양시에서도 언젠가는 희생자들의 떠도는 넋을 위해서 추모비를 세워야 할 것으로 사료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