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기억하는 것과 잊지 않는 것-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생각하며 -
[기고] 기억하는 것과 잊지 않는 것-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생각하며 -
  • 광양뉴스
  • 승인 2020.06.19 17:04
  • 호수 8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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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양임 광양YWCA 이사
김양임 광양YWCA 이사
김양임 광양YWCA 이사

들어가기에 앞서, 배연수 작가의‘기억’이라는 작품을 소개하고 싶다.

 

산부인과 병실을 방문했을 때

산모는 울면서 내 손을 꽉 잡았다.

앞으로 어떤 일도 이겨낼 수 있겠다며

텅 빈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한참 뒤 다시 만났을 때

그녀는 그때 일을 기억하지 못했다.

자신은 그런 말한 적 없다며

덤덤한 눈으로 나를 마주 보았다.

산통을 잊지 못한다면

어떻게 또 아이를 낳겠는가.

기억을 지우지 못하면

누가 앞으로 갈 수 있겠는가.

기억을 믿을 수 없게 되면서

나는 눈치가 늘었다.

 

고통스러운 기억이 스러지지 않고 매 순간 일렁이는 것도 가히 끔찍한 일이라는 것을 감안 했을 때, 적당한 수준의 망각도 정신건강에 이롭다고 할 수 있겠으나 기억하는 것과 잊지 않는 것은 별개의 문제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기억은 어떤 역할을 하는가. 나아가게 하는가, 침착시키는가.

위 작품에서의 산모가 또 아이를 가졌다고 하여 그것을 일컬어 산통을 망각한 어리석음이라 조롱할 이는 없다. 또한, 삶의 문턱에서 어떤 일도 이겨낼 수 있겠다던 다짐이 무색하게 되었을 때 그녀의 마음이 약해졌다고 탓할 이도 없을 것이다. 산모는 분명 산통의 순간을 잊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머지않아 또 다른 아이를 갖는 것을 두고 감히 어리석다 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도 없을 것이다.

최근 정의기억연대 관련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한 분의 기자회견을 두고 이런저런 의견들이 많다. 나 역시 그 분들이 함께 달려온 30년이라는 세월이 어떠했는지를 생각하면 이런 상황이 안타깝기 그지없으나 몇 년 전, 어느 단체의 구성원들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떼 로 몰려가 그랬던 것처럼 용서를 강요할 생각은 없다.

또한 그 피해자들처럼 풍파 많은 세월을 살아본 경험이 없는 까닭에 억울하다 하는 토로를 반박하거나 힐난할 생각도 없으며, 한 단체와 특정인을 향한 그분의 섭섭함을 평가절하할 생각도 없다. 단지, 이성의 한 가닥 끈으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이들이 연대해 온 이유가 무엇인지 잊지 않아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을 뿐이다.

오랜 세월 전쟁범죄 중 특히 여성에게 가해지는 성범죄는 거대한 힘 앞에 속수무책 겪어야 했던 일방적이고 끔찍한 피해임에도 피해를 주장할 수도, 가해자를 처벌할 수도 없었다.

화냥년이라는 욕이 얼마나 슬픈 욕인가.

조선시대, 이역만리 오랑캐 땅에서 모진 세월을 살다 천신만고 끝에 돌아온 여성들에게 환향녀라는 일컬음... 그 말이 화냥년이라는 욕으로 사용되었음을 슬퍼한다.

남편과 사별한 여성이 애통함을 이기지 못해 따라 죽으면 열녀문을 세워주고, 겁탈당하거나 겁탈 당할 위기에 처한 여성이 자살하면 정절문을 세워주는 아름다운(?) 풍속은, 혹시라도 사회가 약자인 개인에게 자살을 강요하는 거대한 구조가 아니었을까?

60년대를 살았던 나의 인식 속에도 순결이니 정조니 하는 개념들이 견고하게 자리 잡고 있을진대 끔찍한 성범죄 피해자들이 되려 순결을 잃었다, 순결을 뺏겼다, 몸을 더럽혔다는 인식 속에서 움츠러들고 숨어야 했던 구조는 어쩌면 현재도 진행형인지 모른다.

일본군들에게 죽음보다 더한 만행을 겪다 겨우 살아 돌아와 죄인처럼 은둔하여 고통의 기억들을 그저 삭이며 살아왔던 분들이 회한의 세월에서 벗어나 국가가 국가를 상대로 저지른 범죄의 피해자로 목소리를 내기까지의 과정이 얼마나 험난했던가, 또한 짧지 않은 30년 간 그 많은 사람들이 연대해 온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피해자들이 한 명씩 무지개다리를 건널 때마다 왜 우리는 그토록 아파했던 것인가. 우리가 치열하게 싸워 왔던 궁극적인 원수는 누구인가. 작금의 상황을 두고 왜 그들이 기뻐하는 것인가. 혹시라도 30년 내내 위안부 피해자 연대 공동체를 분열시키고 무너뜨리려 했던 자들의 주장과 의도를 따라가고 있지는 않은지 우려가 된다.

공동체 내에서 크고 작은 갈등이 있을 수 있겠고 당연히 섭섭한 부분도 있을 수 있으며 잘못한 것이 있다면 책임을 져야 될 것이지만 한 가지 분명한 생각은 그 동안 우리의 발걸음에 동참해 보기는커녕 도리어 직간접적으로 훼방을 놓으며 괴롭혀오다가 현재의 논란에 박쥐같이 편승하여 표정관리 조차도 못하고 날뛰는 부역자들의 행태다.

서두에서 소개한 작품의 시적 화자는 기억의 상실로 인해 눈치나마 늘었다지만 저들을 보면 기억과 함께 눈치마저도 상실해버린 이들이 상당하다는 것을 상기하게 된다.

그러나 그동안 함께 걸어온 우리의 발걸음이 다소 더뎌질지언정 결코 멈춰서지는 않을 것이며 그것이 지역에서 수요집회를 이어가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어쩌면 기억하지 못할지언정 잊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일 것이기에...

어느 작가의 표현과 같이, 정녕 민주주의는 후불제이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