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반생구룡(盤生九龍)-진상면 지랑마을
[기고] 반생구룡(盤生九龍)-진상면 지랑마을
  • 광양뉴스
  • 승인 2020.08.21 17:11
  • 호수 8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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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영신
국사편찬위원회 광양시사료조사위원
안영신 국사편찬위원회 광양시사료조사위원

백운산 줄기로 잇는 마을뒷산 시루봉이 동네를 감싸 안은 듯 포근함이 묻어 있고 앞으로는 마을의 안녕을 지켜주는 조산이 있으며, 건너로는 넓은 평야와 멀리로는 가야산이 한눈에 들어오고 수어천이 흐르는 진상면 지랑마을.

지방도(진상-진월)에서 지랑마을로 들어가자면 왼쪽으로 당산나무숲이 있는데 그곳이 바로 조산(爪山)이다.

안으로 가서 보면 조산정이라는 정자가 있으며 벤치도 여기저기 놓아져 여름철 휴식공간으로 제격이다.

조산정 정자에서 남으로 약 20m 쯤 가면 마을주민들이 1989년 1월에 세운‘김서임상의옹송덕비(金瑞任相義翁頌德碑)’와 그 옆 큰 바위에 ‘구룡반생(九龍盤生: 구룡이 탄생한 곳이라는 뜻으로 아홉형제를 말한다)’이라는 글자가 빨간색으로 새겨져 있는데, 이 글씨는 1950년대 우리고장 제헌국회의원을 지낸 김옥주 의원이 쓴 글이라 한다.

 

지랑마을 앞 조산에 있는 김상의 옹 비문과 반생구룡 바위

 

이곳에는 김녕김씨 돈녕공 취구파 2세인 창화(昌華)공의 아들 4형제 중 막내가 조선왕조 500여년이 무너져가는 격동기인 1873. 2. 21. 진상면 지계리에서 태어나 이곳으로 이사를 와서 구룡을 탄생시킨 명(名)은 상의(相義)이요 자(字)는 서임(瑞任)이라는 분이다. 그는 남달리 기골이장대하여 큰 돌을 드는데 힘을 과시했으며, 큰아들 현주(1900-1950) 세살 때 상업에 뜻을 두면서 이곳 지랑마을로 이주했다.

이곳으로 이사 왔을 당시는 이씨와 양씨 두성씨 집성촌이었는데, 처음 이사 와서는 이들로부터 상당한 괄시를 받았다 한다.

그래서 그는 장사를 해 많은 돈을 모으는 과정에서 마을 안팎 골목정비, 동네입구 조산휴식공간 조성 등에 많은 비용을 기부 동네분들의 환심을 받았으며, 또한 서당을 세워 후세들의 교육에도 특별한 관심을 기울려 마을에 대한 애착심이 많아 훗날 마을사람들이 송덕비도 세웠다.

그는 생에 세 부인으로부터 9남4녀 13남매를 두었다. 첫째부인 차씨(1871년생)는 현주(00-50), 선주(09-75), 희주(12-83) 등 3남2녀 5남매를 두고 세상을 뜨자 둘째부인 박씨(1891년생)가 들어와 옥주(15- ), 계주(16-50), 정주(22-2004), 범주((28-2011), 규주(30-2020), 행주(33-95) 등 6남2녀 8남매를 두었고, 셋째부인 황씨(1903년생)는 자식이 없었다.

이처럼 아들이 9명이라‘구룡’이라 칭한 것 같은데 한 가정에서 두 명의 국회의원이 배출됐으니 무리는 아닌 것 같다.

뿐만 아니라 많은 고관대작이 나와 우리 광양을 널리 알리는데 일조를 한 집안이라 존경의 대상이 아닐 수 없으며 우리 광양에서는 유일무이한 집안이다.

서임 선생이 큰아들인 현주(1936, 광양향교 12대 전교)공을 서울 중동학원에서 2년 교육시키므로 그는 일찍이 신문물(新文物)을 접하여 상업(일본거래)에 눈을 떠서 큰돈을 벌었다.

그리고 동복이복(同腹異腹)형제를 가리지 않고 형제들을 높은 관직에 진출토록 하여, 첫째 동생 선주는 체신청장을 비롯 광양시 제5대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셋째 옥주 역시 우리시 초대 제헌국회의원을 지냈다.

또한 당시 5형제를 일본 중앙대학과 와세다대학에서 졸업시켰으며 나머지 형제들도 서울에서 고등교육을 시켰으니 백년지계를 꿈꾸는 신학문의 요람으로 동생들의 뒷바라지 교육과정에 쏟은 재산이 얼마나 많겠는가.

그는 훗날 동생들 교육이 아니었다면 만석을 채웠을 것인데 6500석의 재산을 이뤘다 한다(당시1년 쌀소비량 70가마). 이러한 교육에 대한 신념이 투철한 사명감이 있었기에 진상중학교 설립시(1948)에도 논100마지기(2만평)을 선뜻 기부하였다.

현주공에 이은 둘째 선주공은 진상초 1회생으로 광양서초(5~6학년)와 서울경기고, 일본중앙대학교를 졸업했고, 순천·부산·서울철도국장을 지낸 셋째 희주공도 일본중앙대를 졸업했다.

또한 옥주 공 이하 6형제들은 모두 양정고(양정보고)를 졸업해 6형제가 모이면“양정고 동문회를 한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었다고 할만큼 9 형제 모두 서울에서 교육을 받았으니 ‘구룡’이란 칭호가 지극히 자연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아버지 서임선생이 옥주공 부터는 대학을 못보낸다고 명령했는데 큰아들 현주공이“동복이복을 가리게 되면 집안이 콩가루가 되며, 논 20~30마지기 재산을 물려주는 것보다 대학 보내는 것이 더 좋은 길이다”며 수차례 설득해 일본 유학길을 열어 와세다대학을 졸업하게 했다.

계주공 역시 일본 중앙대학을 졸업하고 미군정 경찰전문학교 교무과장 겸 교수, 검찰관을 지냈고, 정주공도 일본중앙대학를 졸업하고 충남 경찰국장을 역임한다.

큰아들 현주공의 커다란 교육열이 있었기에 구룡이라는 칭호와 가문의 영광이 동시에 빛을 발할 수 있지 않았나 생각하면서, 한편으로 인물과 부(富)를 함께 누려 구룡반생이라는 글자가 오늘도 지랑마을을 비롯해 진상면과 넓게는 우리 광양시을 빛나게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