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뚝딱이
[기고] 뚝딱이
  • 광양뉴스
  • 승인 2020.09.04 16:24
  • 호수 8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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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덕희 시민기자
신덕희 시민기자

“큰일났어. 인터넷이 안돼”

오늘은 아침 일찍 다른 창고로부터 원료가 들어오기로 한 날이라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출근을 해야만 했다. 아침 설거지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급하게 사무실에 도착했는데, 컴퓨터를 켜니 인터넷이 안된다.

“어떻게 하지. 안되네”

급한 마음에 모바일 핫스팟을 켜긴 했지만 복합기를 사용하는 사무실이라 인쇄기도 안 되는 것 같고, 전화기도 안 된다.

인터넷 하나가 안 되면 요즘은 사무실에서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다.

어제 퇴근시간 무렵에 책상위치를 바꾸느라 컴퓨터의 인터넷 선을 다 뺐다가 다시 끼웠는데 뭔가를 잘못한 모양이다.

사람을 부르자니 9시가 되려면 1시간이나 남은 데다, 접수를 한다고 해서 바로 여기로 뛰어올 리는 만무하다.

답답한 마음에 책상아래에 쪼그려 앉아 얽히고설킨 인터넷선이며, 전화선, 컴퓨터선을 쳐다보는데 뭐가 뭔지 도저히 모르겠다. 일단, 전기나 전선에 대한 지식이 전무한데다 허브랑 공유기도 구분 못하는 나에겐 저 선들은 그냥 헝클어진 실타래로만 보인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어디 봅시다”

구세주가 나타났다. 이사님이시다. 이사님은 이 많은 선들을 찬찬히 훑어보시더니 그 선들을 몽땅 다 빼시곤 하나씩 하나씩 뭔가를 맞추시며 끼웠다 뺐다를 반복하셨다.

“오케이, 이쪽 전화기랑 컴퓨터는 되고.. 다음은 저쪽”

그래도 5대가 되는 컴퓨터와 전화기 선을 다 맞춰서 꽂다보니 1시간이 훌쩍 넘어섰다.

“됐네. 이제 쓰시면 되겠네요”

정말 반가운 말이다. 컴퓨터에 앉자마자 원료를 실은 차들이 들이닥쳤다. 천만다행이다.

사실 엊그제에도 이사님은 고장 난 전기 부저를 고쳐주셨다.

덕분에 나는 창가까지 달려가 수신호를 하지 않아도 되었고, 가만히 앉은 채로 손가락을 까딱여“삐요삐요”만 누르면 되는 크나 큰 호사를 누리고 있었다.

뭔가를 뚝딱뚝딱 고치는 사람들은 참으로 존경스럽다. 더구나 그게 전기와 관련된 것들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자라면서 나는 전기를 만질 일이 전혀 없었다. 전기에 관해서는 직렬과 병렬이 있다는 초등학교 시절의 상식이 전부인 사람이다.

아버지는 목수셨다. 그러나 아버지는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대패로 나무를 다듬는 일만 하지 않으셨다.

목수는 큰 건축을 맡아 모든 결정권을 가지는 대목과 규모가 작은 일을 맡는 소목으로 나누는데. 아버지는 대목이셨다.

고흥읍 내 건물 중 상가며, 창고 등은 거의 아버지 손을 거쳤고 과역이나 포두까지 가셔서 집을 지으셨다.

지금도 시골집 가다보면 보이는 매곡교회는 그 당시 시골에선 처음으로 만든 아치형 교회 정문이어서, 아버지는 이후 한껏 주가를 높이시기도 했다.

그러던 아버지도 환갑을 넘기시자 일이 띄엄띄엄 줄기 시작하셨다.

2, 3층이 아닌 더 높은 건물들이 들어서면서‘건축설계사’라는 직업이 벌써 오래전에 아버지의 자리를 대신하였지만, 그래도 한동안은 공사현장의 십장으로, 또 최고 현장경력자로 불려 다니셨는데, 나이는 어찌 할 수가 없으셨나보다.

바깥으로 일을 나가는 횟수가 줄자 아버지는 동네 모든 집들의 크고 작은 수선, 수리를 하러 다니셨다.

대문을 고치고 물이 새는 창고를 봐주시는 것 뿐 아니라 전기가 나갔다는 집에서는 전기를, 보일러가 고장이라고 하면 보일러를 고치러 나가셨다.

그보다 좀 더 연세가 드시자 이번에는 동네의 모든 고장 난 텔레비전과 라디오가 우리 집으로 모였다.

처음에는 다 고쳐질 때까지 앉아서 기다렸다가 찾아 가셨었는데, 구멍을 뚫어 철사로 묶은 투박하게 고친 가전제품들이 집 마당에 쌓이기 시작하고 나서야 A/S 센터라는 곳이 읍내에 생겼음을 알았고, 머지않아 사람들은 고치기보다는 새로 사서 쓰는 재미에 푹 빠졌다.

직접 만들어 주셨던 나무 책상이랑 의자를 대신해서 철재가구가 들어가고, 부엌의 찬장도 씽크대가 인기를 끌면서 주방가구라는 멋진 이름의 휘황찬란한 가구들로 싹 다 바뀌었다.

아버지는 단지 접지만 불량인 다리미를 버리고 과감히 새로 사는 주위 분들을 이해하지 못하셨고, 우리 집의 거의 모든 가전제품은 하나씩 검은 절연 테이프로 땜방이 되었다.

날마다 방바닥에는 고장 나서 못 쓰는 가전제품들이 공중분해 되어 있었다.

아버지가 드라이버와 철사와 본드, 그리고 까만 절연 테이프를 찾으실 때 마다 나는 마뜩찮아 고개를 돌리기 일쑤였고, 구차스럽고 촌스러운 그 제품들을 전부 버리고 다 새로 사시기를 얼마나 고대했는지 모른다. 그렇다. 다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았던 옛날 옛날얘기이다.

지금 우리 집엔 접지가 되었다 말았다하는 헤어드라이어가 2개나 있고, 꾹꾹 눌러도 잘 되지 않는 TV리모컨도 있다. 작은방이랑 거실 두 곳은 나란히 있는 3개의 전등 중에 1개가 안되는데, 새 전구를 갈아 끼워도 불이 들어오질 않는다.

아버지가 고치실 때 어깨너머라도 좀 배워볼 걸. 아버지가 계셨으면 조끔씩 새는 세면대 수도꼭지도 담박에 고쳤을텐데.

우리 애들은 그런다.“엄마. 버리고 새로 사”,“사람 불러서 새 걸로 다 바꿔달라고 해”

나도 나이가 들었나보다. 쓰던 물건을 휑하니 바꾸고 새로 사는 것 보단 고쳐쓰는 게 더 좋다. 아! 뭔가가 고장이 났을 때, 이사님이나 아버지처럼 뚝딱뚝딱 내가 고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가끔씩 들르는 시골집! 물파스를 찾으러 무심코 열어본 앉은뱅이 책상 서랍 안에서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는 손때 묻은 뺀지며, 드라이버, 스패너가 보인다. 아직은 날이 덥다. 틀려고 잡아당긴 선풍기선 끝에서 까만 테이프가 감긴 플러그가 따라 나온다. 지겨워하지 말걸. 그리움에 눈물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