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를 만나다 (열한번째 이야기)
나무를 만나다 (열한번째 이야기)
  • 광양뉴스
  • 승인 2021.03.12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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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순심 숲해설가(숲마루)

나무를 만나다 <열한번째 이야기>

가장 좋아하는 나무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매번 같은 대답을 한다.

“가장 좋아하는 나무가 없습니다. 그저 나무를 좋아합니다.”

하던 일을 정리하고 숲해설가로 방향 전환을 결심하기 전에 두 가지 자가 테스트를 했다. 체력 테스트와 숲에 대한 매력도 체크. 평소 치밀하고 계획적이고 목적지향적인 삶과는 거리가 먼 설렁설렁 살아온 사람인데, 40대 중반에 변화를 주려고 생각하니 나름 고민이 됐던 것 같다.

그런데 막상 산에 올라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내가 산을 너무 잘 탔다. 오를수록 피곤하기는커녕 에너지가 활성화되는 개운한 느낌. 체력을 고민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다음은 숲에 대한 매력도 체크. 스스로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대상을 소개하며 떠든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그런 괴로움을 감수하려고 방향 전환을 하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다. 그런데 휴일이면 종종 찾은 산은 묘하게 매력이 있었다. 그 매력의 중심이 바로 나무였다.

내가 뒷산 가야산을 첫 학습장 삼아 오르기 시작한 그 무렵이 생강나무에 노란 꽃이 피던 이맘 때였다. 물론 생강나무를 듣도 보도 못했던 때라, 작고 노란 꽃송이가 뭉쳐서 피어 있는 것이, 마치 나뭇가지에 끼워진 꽃반지 같아 보여 그저 신기하기만 했다.

얼마 안 가서 눈보다 코가 먼저 알아챈 나무가 암모니아 냄새를 풍기는 사스레피나무였다. 나뭇가지에 닥지닥지 붙은 종 모양의 작은 꽃이 땅을 보고 피었는데, 작고 귀여운 꽃이 향기 대신 화장실 냄새를 풍기니 그 역시 또 얼마나 새롭던지.

지금이야 오르는 산마다 나무의 이름을 불러주며 벗 삼아 오르지만 처음 산에 오르던 그때는 일부러 애써 나무의 이름을 알려고 하지 않았다. 나무의 이름을 부르는 대신 나무 그대로의 모습을 눈에 담는 것이 좋았다. 처음에는 모든 나무들이 다 엇비슷해 보여 차이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 나무의 껍질 즉 피부라고 할 수 있는 수피, 나무의 모양인 수형, 나뭇잎, 꽃을 눈에 담으며 가야산 곳곳의 등산로를 즐겁게 수차례 돌아다니다보니 어느 순간 이름은 몰라도 나무들의 차이가 보였다. 게다가 장소에 따라 약간 달라 보이는 나무도 실은 같은 나무라는 사실을 알아채기 시작했다. 같은 종의 나무도 바람의 방향, 햇빛, 주변 나무 등 크고 작은 환경의 차이에 따라 그 자람새가 많이 달랐다.

그리고 나무마다 저마다의 크고 작은 상처의 흔적이 새겨져 있었다. 갈라지고, 터지고, 더부살이하는 객식구가 뚫어 놓은 구멍, 암 덩어리 같은 혹을 달고 있기도 했다.

견디기 어려울 만큼 힘들면 가장 약한 부분을 하나하나 스스로 버려가며 최후에는 완전히 생을 마감하고 소멸해가는 나무들의 모습은 온전히 자기 의지로 살아가는 생명체로 보여 오히려 경건함 비슷한 것이 느껴지기도 했다.

사람에 의해 관리되고 다듬어지고, 생과 사가 사람들에 의해 결정되는 도시공원의 나무에서는 볼 수 없는 그 어떤 강렬함 같은 것.

그래서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난 그런 나무들이 안쓰럽기보다는 참 대견해보였다. 산에 있는 나무들은 저마다의 자리에서 자신들이 살아내야 할 삶의 몫을 스스로 선택하며 당당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사람의 손에 의해 관리되고 다듬어져서 자기가 사라져버린 도시공원의 나무들에 비하면 훨씬 행복할 거라 여겼다. 등산로에 가까이 있는 나무들은 예외겠지만.

나무의 경쟁방식도 나를 감동시켰다. 나무들의 경쟁이 치열하면 할수록 숲은 더 아름다웠다. 나무의 경쟁은 독점을 향한 싸움이 아니라 여백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백을 찾아 뒤틀리고 꼬인 크고 작은 가지들, 곧게 자라지 못하고 휘어진 몸통은 마치 몸으로 말하는 행위 예술을 보는 듯했다.

이런 나의 생각에 나무가 코웃음을 칠지도 모르겠지만 내게 나무는 그렇게 다가왔고 아직도 그렇다.

그렇게 나만의 방식으로 나무를 만나고야 비로소 도감을 보며 이름을 찾아주기 시작했고, 이제 그 이름들에 익숙해졌다. 그리고 조금 더 나무를 이해하고자 식물생리학 책을 펼쳐보는데 쉽지 않다. 그래도 나무를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넘어야 할 또 하나의 과정에 들어서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