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눈으로 똑똑히 보고 경험했던 5.18
내 눈으로 똑똑히 보고 경험했던 5.18
  • 광양뉴스
  • 승인 2021.05.21 17:04
  • 호수 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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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균 광양청년꿈터 센터장

 

1980년 5월 나는 고등학교 1학년. 그날은 중간고사가 치러지는 날이었다.

시험인지라 모두가 긴장 속에 대비했던 날로 기억된다. 첫 시험시간을 마치자마자 임시 휴교라는 고지가 떨어졌다.

데모가 심해질 대로 심해진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휴교령까지 내려질 줄은 몰랐기에 모두들 의아해하면서도 즐거워한다. 어찌 되었건 학교를 쉬는 것은 좋은 일이니까.

1교시 시험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아버님이 운영하시던 조그마한 개인병원이 충장로 1가에 있었고, 우리 가족들은 병원 5층에서 살고 있었던지라 5월 18일 전후의 상황을 아주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충장로 1가는 시민을 향해 첫 발포가 있었던 도청 앞 분수대가 있는 금남로 1가에서 몇 백 미터 떨어지지 않았던 지근거리다. 1교시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충장로 1가 우체국 앞에서 마주친 장면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무고한 시민들을 연행해 가다

1980년 5월 18일,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가 비상계엄령 확대 조치 후, 전국 대학교에 휴교령이 내려진 가운데 전남대학생들이 계엄령 선포 철회를 요구하며 대학 정문 앞에서 계엄군과 대치하고 있다. 사진제공=5.18기념재단
1980년 5월 18일,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가 비상계엄령 확대 조치 후, 전국 대학교에 휴교령이 내려진 가운데 전남대학생들이 계엄령 선포 철회를 요구하며 대학 정문 앞에서 계엄군과 대치하고 있다. 사진제공=5.18기념재단

 

군복을 차려입은 군인들이 2열종대로 5~6줄. 그러니까 12~14명 정도가 열을 지어 다니며 학생처럼 생긴 젊은 친구들을 다짜고짜 잡아들였다.

그들은 총을 들고 있었는데 그때는 그게 무슨 총이었는지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M16이었던 같다.

살벌한 기세로 지나가는 젊은 청년, 남녀를 구분하지 않고 불러 세워 한마디 말도 물어보지도 않고 주먹으로 기선 제압을 해 쓰러트린 뒤 인근에 대기하고 있던 닭장차(군인 수송용 트럭 - 시민들은 당시 그렇게 불렀다)에 실었고, 일정 인원이 채워지면 닭장차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엄청난 살기가 느껴졌고 옆에서 보고 있던 시민들 어느 누구도 왜 잡아가냐고 대꾸하지도 못했다.

​실려 가는 모습들이 너무 무섭고 두려워 못 본 체 지나치려는 나에게도 군인들이 가까이 다가왔다.

검지로 이리 오라는 신호를 보낸다.“저.. 저요?”하며“저는 고등학생인데요”라고 말을 꺼내려 했지만 워낙 떨려서인지 말도 나오지 않았다. 어버버 더듬거리며“아니 아니에요. 저 아니에요”사시나무 떨듯이 눈을 감으며 손사래를 치는 사이 갑자기 퍽 소리가 들려왔다.

내 옆을 보니 누군가가 쓰러져있다. 내 옆에서 나처럼 구경하던 사람이다. 고꾸라져 신음하는 사람 목 옷가지를 붙잡고 질질 끌어 닭장차로 데려간다. 사람이 아닌 개·돼지를 취급하듯 아주 간단명료하고 절도 있게 처리했다. 군 작전 수행하듯 표정 하나 없이..

저 학생 안 잡혀야 하는데

도청에서 2~3분 거리에 동명동이란 곳이 있다. 조그마한 실개천이 흐르는 곳이고 개천 위로 짧은 다리가 있다. 다리 바로 앞에서 계엄군과 시민이 대치해 있고 구호를 외치며 평화적으로 시위를 하고 있던 중 갑자기 닭장차들이 몰려왔다.

차에서 내린 군복을 입은 군인들이 달려들며 시민을 향해 돌진하자 혼비백산 시민들이 흩어졌다. 아주 어린 여학생처럼 보이는 이가 실개천이 흐르는 다리 밑으로 숨어 들어가는 것이 내 눈에 들어왔다.

‘저 학생 안 잡혀야 하는데, 살아야 하는데’가슴 졸이며 지켜보는데 주택가까지 샅샅이 뒤지며 다녔지만 빈손으로 돌아오던 군인 한 명이 멀찍이 다리 밑 사람 움직임을 포착한 듯 잽싸고 빠르게 다리 밑으로 달려 들어갔다.

걸어서 들어갔던 여학생이 힘 하나 없이 축 처진 모습으로 늘어져서 목 옷가지에 붙잡힌 채 질질 끌려 나왔다. 마찬가지로 닭장차에 실렸다.

시민들을 향한 발포

주위에서 첫 발포라고 하는데 나는 확실히 모르겠다. 첫 발포인지 두 번째 발포인지.

그러나 총알은 분명히 날아다녔다. 도청 앞 분수대를 가운데 두고 도청 쪽에는 장갑차를 앞세운 군인들이 경계 총으로 서있었고, 금남로 쪽에는 시민군들이 도열해 있었다.

시민들 뒤로는 차량도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군인들은 장갑차 좌우 두 대에 겹겹이 총을 들고 서있었고, 시민군들은 돌과 화염병 막대기 등은 들고 있었지만 총은 없었다.

용감무쌍하게도 고1짜리(필자)는 집이 인근인지라 구경 차 나와서 한발 두발 접근하다 보니 시위 앞쪽 자리다.

​시민군들이 화염병과 돌을 던지며 밀고 댕기고 하던 중 갑자기 콩 볶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기 시작한다.

“진짜 총이다. 총 쏜다. 피해라”며 누군가 외치니 모두들 황급히 몸을 숙이고 뒤돌아 달려 나갔다.

나 또한 죽기 살기로 뒤를 향해 뛰는데 옆줄에 한 아저씨와 경찰오토바이 복장의 교통순경 아저씨 두 사람이 고개가 축 처진 초등생 정도 되는 학생 몸을 붙들고 뛰고 있었다. 머리에 총을 맞은 듯 축 처진 머리에서 피가 줄줄 흐른다. 아~~ 죽기 살기로 더 뛰고 뛰었다.

잡혀가 모진 고초를 겪은 친구 이야기

내 얘기가 아닌 친구 이야기다. 이 친구는 원래 나보다 고등학교를 1년 먼저 들어온 선배다. 그러나 5.18 당시 전남대학교 교정에서 공수부대원들에게 시민군으로 오인 받아 죽기 살기로(친구 표현) 곤봉으로 두들겨 맞은 후유증으로 인해 1년을 휴학하고 나서, 나와 절친이 된 사이다.

어떻게 맞았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정신을 잃을 만큼 온몸을 두들겨 맞은 후유증으로 인해 1년을 고생했고, 지금도 비만 오면 온몸이 쑤시고 저린다고 한다.

여자 1명(주변 일신방직 여공으로 추정)과 남자 1명, 친구 포함 총 3명을 곤봉으로 내리치면서 나누던 공수부대원 들의 대화 내용은 가히 상상 초월이다.

“XX 버려”, 이 한마디가 아직도 생생히 떠오른다 말한다. 얼마나 무섭고 두려웠는지 친구인 나에게도 이야기하기 어려웠던 모양이다. 해년마다 돌아오는 5.18 때마다 어떻게 맞았냐고 물어보면 침묵을 지켜오던 친구인데 최근에야 조금씩 풀어놓는다. 아주 조금씩...

​내 친구를.. 광주시민을 짓 밟고 상승가도를 내 달리던 전 모 씨. 지금까지도 큰소리치며 세상 두려운지 모른다.

그의 나이 이제 80 즈음.. 많이 남지 않은 그의 여생에 부디 저지른 만행을 속죄하며 당신으로 인해 고통 받았던, 고통 받고 있는 광주시민들에게 위로의 말, 죄송하다는 단 한마디의 말이라도 건네며 용서를 비는 자가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