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사이를 걷다
도시 사이를 걷다
  • 광양뉴스
  • 승인 2021.09.03 17:52
  • 호수 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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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성진
건축가(도시공학박사)
노성진공간연구소장

100세 시대의 자본+대안사회 희망

근대 자본주의와‘파라노이아(paranoia)’는 상당부분 공통분모 상태로 지속되고 있음을 자인하는 사람들이 많다.

사전에서는 파라노이아를‘체계적이고 지속적인 망상(delusion)을 나타내는 병적 상태를 말하며 정상적인 사람으로부터 정신병자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정신 과정이자 편집증적 병리’라고 적고 있다.

20세기 자본주의는 멈추지 않고 돈을 벌었다. 재산을 산더미처럼 쌓고도 배는 부르지 않는 서글픈‘파라노이아’ 병을 앓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현상을 능력 있는 행위로 보거나 고민 없이 우상숭배수준으로 치환된 자본주의병, 라보에티가 말한‘자발적 복종’에 든 대다수의 대중들을 어떻게 볼 것인가이다.

반질거리는 자본주의의 포장에서 시작된 불행의 원인을 역설했던 니체, 행복을 미래에 두고 지금의 불행을 참아내며 살면서도 자기집착을 부정당했을 때 큰 상처를 입는 사람들을 내버려 두는 신은 어디 갔는가! 라고 한탄한 니체는‘신은 죽었다’로 20세기를 대변하고 있다.

20세기 기인 영성가면서 철학자 구르지에프는 20세기 사람들은 자기도 모른 사이에 자기가치를 해치는 자본주의에 도둑맞았다고 역설한다.

우리가 20세기에 열망했던 집은 무엇이었을까! 유대인들에게는 기원전 8세기경 타의에 기인한 아시리아의 공격을 받고 정든 땅을 두고 쫓겨 흩어진다는 뜻의 디아스포라(그리스어διασπορά)가 있었다.

우리는 70년대 살고 있던 땅을 떠나 규격화 된 집합주택으로 스스로 스며들어오게 한 그 커다란 힘은 무엇일까? 땅과 집이란 어느 민족보다도 절대적인 인연과 생명의식을 가진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 말이다.

우리에게 자본주의의 강력한 상징물은 뭐니뭐니해도 달콤한 아파트다. 아파트는 정주형(定住形) 주택으로 볼 수 없는 것이 정설이다. 하이데거가 주장하는 주거의 개념은‘땅, 하늘, 그리고 같이 이웃되는 사람’이라고 했던 것처럼 이 세 가지 모두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편리하게 잘 만들어진 매력물은 될 수 있으나 자본에 의존된 규격화, 구획화안에 원전 에너지를 소비할 수밖에 없을 뿐 아니라 재산증식으로 일컫는 신분상승의 척도로 보는 점핑배드(Jumping Bed)로 점철되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와 상대적으로 다른 이즘은 바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주의 경제이론이다. 그 이론은 무엇보다도 봉건사회의 탈출을 꿈꾸던 세계는 일시에 매료되었다. 이것은 꿈의 이론이었기 때문이었다. 유물론과 사회주의가 결합하면 아름다운 공산주의가 완성된다는 것을 역설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현실은 어떠한가? 공산주의는 조금 일찍 100년도 가지 못해‘이대(異對)올로기-필자’부추김과 파워게임으로만 치달았을 뿐 실패로 마감했다. 알고 보면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자본주의 또한 더욱 크게 실패했다고 결론 내릴 수 있다.

전자는 공산(共産)은 있어도 공존(共存)이 없었고(권력과 인간 가치의 오남용에 대한 제어장치 조정실패가 원인) 후자는 풍요라는 이름 아래 눈을 감은 채 비행하면서 욕망의 제어장치를 마련하지 못한 풍요의 덫에 걸려 실패한 것이다. 풍요의 맛을 아는 인간은 하향 조정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제‘공동체 삶’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과거 100년 동안 행해졌던 자본과 공산에 나타난 절대적 허무, 욕망과 권력의 시녀로 길들여진 시이저의 국민, 자율성이 배제된 로마인들의 환상에서 벗어나는 일이 급선무가 되었다.

미국과의 수십 년의 정치적 갈등과 피크오일시대로 빚어진 쿠바의 경제파탄은 바로 도시농업공동체(community solution)에서 대안을 찾아냈다.

어느 날부터 전기가 끊겨가고 생필품이 바닥나기 시작한 쿠바의 도시사람들은 화려했던 풍요의 기억을 뒤로 하고 호주인이 옥상에 텃밭을 만들어 자급자족하는 것을 보고 도시의 빈자리를 찾아내어 도시농사를 시작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나아가 석유의존도에서 벗어나는 일들-자전거의 대거 등장, 도보의 일상화는 당뇨병, 심장마비, 노졸중이 놀랄 만큼 줄어 쿠바사람들을 건강하게 만들었다.

절망적 환경에서 찾아 낸 행복과 공동체의 힘은 오히려 새로운 유기적 가치관을 발견하고 개인경제와 지역경제의 통합을 통해 협력, 환경보전 및 절감의 가치를 채용한 지역공동체로 자본주의적 폭력성을 이겨낸 사례를 보여준다.

활사개공(活私開公) :‘나를 살리면 모두가 열려 살려나간다’는 위대한 가치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요즘 농업, 어업부자라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자본주의 도시유목민-결코 자본의 힘에 의해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동안 새로운 가치를 발견한 사람들의 두뇌농업, 창조농업, 과학농업, 상대적으로 텅텅 비어있는 농촌의 인구유입과 농촌 경제 활성화, 760만명이 대기하고 있는 베이부머세대의 은퇴시기와 고령화, 떨어질 줄 모르는 청년실업의 현주소 앞에 고육책으로서의 농업이 아니라, 오히려 이러한 계기를 통한 혁신적 정부의 지원과 지역자원, 지자체의 인구유입노력, 고급인력이 준비 완료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이다.

이제 로마가 멸망하면서 자연스럽게 대안이 된 공동체 사회 *모샤브 *키부츠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적당하게 결합 된 상태로 지금까지도 유지되는 건강한 지속성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사실 개별 귀농은 80%이상이 실패한다. 그 이유 중에 충분히 납득이 갈 수밖에 없는 지역민과의 갈등이 가장 많고, 기술, 소득문제에 걸려 3년에서 5년 이내에 다시 도시로 복귀한다는 통계이다.

상대적으로 취약한 개인의 귀농보다 단지귀농으로 경험과 리더쉽이 있는 지도자의 경영 농·어업이 세일즈파워를 확보하는데 유리할 수밖에 없다는 증거다.

영농·어법인 조합원은 모두가 적당한 노동의 결과로 공동생산+제조+서비스가 결합되는 창조 대안산업의 경영으로 모두가 직원이 되고 모두가 같은 목표를 향해 만들어진 수익은 1/N로 분배한다.

이것은 실내 집약농업, 과학농업이기 때문에 개인의 농업기술, 유통능력을 절실히 유구 되지 않아 과거의 농경시대의 절기농업, 노지농업의 두려움은 배제 될 수밖에 없다.

매우 현실화 된 에너지 세이빙시스템, 절약형 주택, 적정수준의 소득이 유지된다면 매우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

절대적 달콤함으로만 결론 내릴 수는 없지만, 정주와 소득이 합일 된다는 것은 과거의 농경사회의 고된 노동이 크게 줄고 삶과 자연, 그리고 사람과의 유대감이 형성되는 유기적 관계를 회복하는 일임에는 틀림이 없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