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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양뉴스
  • 승인 2021.10.01 16:41
  • 호수 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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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순심 숲해설가(숲마루)

사람들에게 잊혀진 길은 자연으로 돌아간다 <열 일곱번째 이야기>

영광의 길 없는 숲에서 길을 만들며 다니다가 멧돼지의 다양한 흔적들과 맞닥뜨린다.

죽은 지 꽤 시간이 지난 멧돼지의 아래턱뼈와 몇 개의 뼈 조각들. 가죽도 살도 하나 없이 뼈만 남은 것이 죽은 지 넉 달은 더 지난 것 같다.

올 봄 광양의 중흥산성 임도에서 멧돼지 사체를 본 적 있는데, 그때 경험으로 보면 그리 보인다.

멧돼지가 조릿대로 만든 은신처. 둥지일까? 잠자리일까? 단순 잠자리로 보기에는 두껍고 푹신푹신하고 아늑한 것이 공을 많이 들였다.

그렇다면 새끼를 키우기 위한 둥지! 멧돼지는 한 번에 여러 마리의 새끼를 낳기 때문에 비교적 미성숙한 새끼를 낳는다. 그래서 부모의 보살핌이 있어야하니 안전하고 아늑한 둥지가 필요하다.

어릴 적 몇 번 안 되는 야생의 경험 중에 하나가 멧돼지 둥지의 어린 새끼 몇 마리를 만난 것이다.

덩굴식물과 키 작은 나무가 커다란 바위를 둘러싼 곳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서 살짝 들여다보니 까만 생명체가 여러 마리 보였다.

너무 놀라서 생각이란 것을 할 틈도 없이 냅다 뛰어 도망친 적이 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곳은 멧돼지 새끼가 살고 있던 둥지였다.

커다란 바위 밑에 움푹 파인 곳이 있었는데, 그곳을 덩굴식물과 키 작은 나무가 둘러싸고 있어 새끼를 키울 둥지로 안성맞춤이었던 것 같다.

그 이후 본 적이 없던 멧돼지 둥지를 영광의 길 없는 숲을 헤집고 다니다 다시 만났다.

사람이 다닌 흔적이 거의 사라진 숲에, 돌본지 오래된 무덤 봉분을 허물고 만든 진흙웅덩이. 멧돼지가 무덤 봉분을 파헤쳐 놓는 일이 종종 발생한다는 기사를 몇 번 접한 적이 있다.

사람들이 성묘 뒤 무덤에 막걸리를 뿌리고 가면 발효냄새를 좋아하는 멧돼지가 그걸 먹으려고 무덤 봉분을 파헤치는 경우가 있다.

게다가 제초제를 쓰지 않는 봉분에는 지렁이, 굼벵이 등 동물들이 많이 살고 있는데, 청각과 후각이 발달한 잡식성인 멧돼지가 이 동물들의 흔적을 쫓아 봉분을 파기도 한다.

그 외에도 봉분에는 일반 흙의 표토나 먹이에는 없는 성분이 있어 그걸 섭취하기 위해 파헤치기도 한다는 것을 야생동물흔적도감에서 읽은 적이 있다.

그런데 봉분의 진흙웅덩이는 목욕탕으로 사용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일단, 사람의 길이 사라진지 오래된 숲에, 돌보지 않은지 오래된 무덤이라 누군가 막걸리를 뿌리고 갔을 리가 없고, 오랜 시간이 흐른 봉분의 성분도 주변 흙과 성분에 별 차이가 없지 않을까 싶다.

혹시 봉분에 살고 있는 벌레들을 잡아먹으려고 파헤쳐 놓은 곳에 빗물이 고이자 그곳에서 진흙 목욕을 하다 보니 웅덩이는 커지고 장마철이면 잦은 비로 물은 계속 고여 있었을 테니 전용 목욕탕이 된 것이 아닐까.

발견 당시에도 진흙웅덩이는 물기로 촉촉했다. 봉분 주변 소나무에 녀석이 몸을 비빈 흔적이 있는지 찾아보지 않은 것이 안타깝다. 그럼, 확인이 됐을 텐데. 야생동물 탐사가 목적이 아니라 식생조사를 목적으로 한 일정이라 되돌아보니 아쉬움이 있다.

진흙웅덩이가 된 봉분에는 오소리 똥굴도 있었다. 무덤의 주인에게는 미안한데, 오소리와 멧돼지 중에 그곳을 먼지 찜한 녀석은 누굴까 궁금해진다.

사람들에게 잊혀진 숲속의 오래된 길을 걷다보면 야생동물의 흔적이 많이 보인다. 그 흔적에서 내가 읽어낼 수 있는 이야기는 많지 않다.

숲에 들어가면 그 숲이 품은 이야기를 다양하게 읽어내고 싶어진다. 그런데 그 이야기는 너무 짧고 단순하다. 내가 숲을 이해하는 깊이가 딱 그 정도 밖에 안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늘 아쉽다.

그래도 영광의 숲을 일주일 넘게 사람들에게 잊혀진 길로만 다니다 보니, 사람들에게 잊혀진 길은 빠르게 자연으로 되돌려지고 더 많은 이야기를 담은 길이 될 수 있음을 새삼 느껴본다.

사람들에게 잊혀진 사람의 길은 원래 동물들의 길이었는지도 모른다. 시간이 지나 원래의 주인에게 되돌려진 것일지도 모르겠다.

사람의 길과 동물의 길이 하나인 길, 그런 길은 얼마나 다양하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품게 될까.

우리의 숲에도 사람과 동물이 자유롭고 안전하게 함께 다닐 수 있는 길이 있으면 좋겠다. 사람들에게만 편리한 그런 길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