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순사건 73주년 기획보도 ②] 백운산 계곡만큼 깊고 긴 아픔
[여순사건 73주년 기획보도 ②] 백운산 계곡만큼 깊고 긴 아픔
  • 지정운 기자
  • 승인 2021.10.15 17:41
  • 호수 9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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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역사적인‘여수·순천 10·19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국회 본회의에서 제정되면서 희생자 유가족들의 73년 한을 풀 계기가 마련됐다. 현대사의 비극인 여순사건은 1948년 10월 19일 발생한 이후 여수와 순천을 포함한 전남지역은 물론 전북과 경남 서부 등에도 진한 상흔을 남겼고, 특히 광양은 백운산 계곡처럼 길고 깊은 상처에 고통 받아야 했다. 특별법 제정에 맞춰 인근 도시들은‘여순사건’을 지역의 역사·문화적 자산으로 확보하기 위한 발 빠른 행보에 나선 모습이다. 광양시도 전문가 토론회 개최와 바로알기 교육, 지역전문가 육성, 기념 시설 건립 등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계획 단계에 머물러 있다. 이에 광양신문은 광양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된 여순사건과 한국전쟁 전후 여건과 피해 상황 등을 살펴보는 기획보도를 연재한다. 인용된 자료는 지난 2013년 광양시의회 의원 연구모임이 수행한‘한국전쟁 전·후 광양의 민간인 희생자 조사 연구 활동 결과 보고서’를 중심으로 정리했다. [편집자 주]

<글싣는 순서>

1. 73년 한 풀게 되나…‘여순특별법’제정

▶ 2. 백운산 계곡만큼 깊고 긴 아픔

3. 가장 많은 피해자 나온 광양읍

4. 전쟁 전 큰 피해…봉강, 옥룡면

5. 군경과 빨치산 양쪽에 희생…옥곡, 진상, 진월

6. 섬진강변 25㎞ 늘어선 다압면의 슬픔

7. 이젠 진실 규명·명예 회복의 길로

 

△ 백운산 전경(봄 파노라마)
△ 백운산 전경(봄 파노라마)

여순사건→한국전쟁으로 이어지며 피해 가중

빨치산 습격에 군경 토벌 반복…주민 희생

 

여순사건 발생과 광양의 피해

정부가 수립된지 두달여 만인 1948년 10월 19일 오후,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국방경비대 제14연대에서 제주 4·3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하고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제14연대 내 좌익계 하사관들이 주도한 봉기는 일반 장병들의 동의를 얻으며 다음날엔 여수와 순천을 점령했고 곧이어 전남 동부지역으로 번져나갔다.

이에 정부는 같은 달 21일 반란군토벌전투사령부를 광주에 설치하고 7개 연대 총 12개 대대 병력을 투입해 진압에 나섰다.

광양에서는 경찰이 10월 20일 반군을 진압하기 위해 순천으로 향하던 중 반군의 기습을 받아 3~4명의 희생자를 내고 퇴각했는데, 이를 앙갚음한다며 광양경찰서에 수감되어 있던 좌익 혐의자들을 덕례리 주령마을 반송재로 데려가 총살시키는 이른바‘덕례리 학살사건’이 발생한다.

이후 반군의 주력이 광양에 도착한 것은 10월 22일로, 광양에 진출해있던 반군은 광양읍 솔티재에서 15연대(마산주둔)의 진압군을 기습했다.

15연대의 광양진입이 실패로 돌아가자 광주 주둔 12연대를 투입해 진압에 나섰다.

10월 23일에는 광양에 정찰부대가 파견돼 군청과 경찰서를 점령한 좌익세력을 습격, 70여명을 사살하고 10여명의 좌익인사를 검거해 총살했다.

또 백운산을 끼고 있는 봉강, 옥룡, 옥곡, 진상 일대의 상당수 주민들이 반군색출을 명목으로한 진압군과 경찰에 의해 억울한 희생을 당한 사례가 많이 발생했다.

한 예로 1948년 10월 26일부터 30일까지 진상면 어치마을 주민들이 집단 학살 당하기도 했다.

10월 27일 반군이 봉기했던 여수가 탈환되자 여순사건은 공식적으로 막을 내리고 1000여명의 반군은 백운산과 지리산으로 입산해 기존의 지방 유격대와 합류해 광양, 구례, 곡성, 하동 등을 무대로 활동에 들어갔다.

여수나 순천의 경우 비교적 짧고 굵게 사건이 진행된데 비해 광양이나 구례 등에서 후유증이 깊고 길어질 수 밖에 없었던 이유다.

여순사건 발생 1년이 경과한 1949년 9월께 광양 백운산을 무대로 활동하던 빨치산은 이현상이 지휘하는 제2병단 제7연대로 재편하고 1949년 9월16일 새벽 빨치산 약 150명이 광양읍내를 공격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로 인해 광양경찰서 등 주요 관공서가 불타고 경찰 9명과 군인 20명이 사망했다.

빨치산이 철수한 후 광양경찰은 광양읍을 비롯한 각 면에서 좌익에 협조적인 주민을 색출했다. 이 과정에서 100여명을 훨씬 상회하는 민간인들이 구산리 우두마을, 덕례리 반송재, 사곡리 솔티재, 세풍리 검단재, 순천시 서면 구랑실 등에서 살해됐다.
 

한국전쟁과 광양지역 민간인 피해

1950년 6·25전쟁이 발생한 지 1달만인 7월 25일 북한군이 광양에 들어옴과 동시에 인민위원회가 설치됐고, 백운산을 거점으로 활동하던 빨치산 40여명이 합류했다.

이들은 북한의 점령정책에 따라 공개적으로 활동하다가 인천상륙작전으로 다시 전세가 기울자 미처 북으로 후퇴하지 못한 북한군과 좌익세력들은 백운산과 지리산으로 입산해 빨치산 활동을 다시 시작했다.

광양 주민들은 6·25전쟁 이전과 마찬가지로 군경토벌대와 빨치산의 틈바구니에서 다시 고통을 당하고 희생을 치르며 아픔을 겪어야 했다.

6·25전쟁기의 가장 큰 사건은 백운산 빨치산의 광양지역 주요관공서 습격사건이다. 1951년 1월 14일 백운산에서 활동하던 빨치산 800여명이 광양읍사무소와 광양경찰서 등을 불태웠고 반격에 나선 군경이 구금중인 좌익 혐의자와 그 가족 등을 같은 달 16일께 살해했다.

또 같은 날 옥룡면 파출소에서도 좌익 혐의자 모두를 봉강면과 옥룡면의 경계지점에서 총살시킨 것으로 전해진다.

이처럼 광양의 모든 지역에서 빨치산의 습격과 군경 토벌대의 좌익 혐의자 색출 및 학살이 반복적으로 발생하며 주민들이 희생을 당했다.
 

△ 광양읍 전경 1975년

한국전쟁 전후 지역 민간 피해자 규모와 특징

광양지역에서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피해자로 신상 정보가 확인된 경우는 총 612명 정도로 파악된다.

2009년 광양시에서 전남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에 의뢰해 집계한 563명(진실화해위원회 접수자 65명 포함)과 2013년 광양시의회 연구모임에서 추가 발굴한 49명 등을 더한 수치다.

피해 유형별 분석을은 보면 군경토벌 피해자 107명, 부역혐의 45명, 빨치산 13명, 여순사건 관련 328명, 좌익 2명, 형무소 30명, 미군사건 6명, 보도연맹 6명, 인민군 15명, 개별 사건 및 기타 60명이다.

지역별로는 광양읍이 134명으로 가장 많고 다압면이 91명, 옥룡면 88명, 진상면 81명, 옥곡면 62명, 골약면 55명, 봉강 51명, 진월 50명 순이다.

광양은 여순사건의 영향권에 포함된 지역으로 특히 백운산은 빨치산 전남도당의 거점이었던 관계로 군경의 토벌과정에서 희생된 비민간인과 비광양인의 수도 결코 적지 않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울러 이 시기 지역 민간인 희생자 사건의 특징은 여성 피해자의 규모가 현저히 낮다는 점이다. 다른 지역의 경우 여성 피해자가 20% 전후를 차지하는데 비해 광양은 남자 피해자가 575명으로 전체 피해자의 약 94%에 달하며 여성 피해자는 약 6%인 37명에 불과하다.

이는 백운산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빨치산과 군경의 전투과정에서 남자들이 집중적으로 희생됐다는 것을 추정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