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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양뉴스
  • 승인 2021.10.29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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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순심 숲해설가(숲마루)

아윤이와 함께한 백운산 노랭이봉… “풍경이 이쁘긴 하네”<열 여덞번째 이야기>

백운산 노랭이봉을 오르던 4학년 조카. 곤충이 안 보이니 이모 발걸음이 빨라서 좋다더니, 잠시 후에는 “아, 곤충아! 좀 나타나라” 하소연이다. 곤충이 없으니 이모 걸음이 너무 빠르다나.

이번 산행은 6학년 아이들 도전활동 코스 답사라 시간 체크하고, 중간중간 쉼터, 간단한 관찰 지점 등 활동 공간을 파악해야 해서 평소 산행처럼 느긋할 수가 없다.

산을 오르며 공감과 투덜거림을 반복하던 조카. 정상 표지석에서 인증샷을 찍고 주변을 둘러보더니 “풍경이 이쁘긴 하네”그런다.

그리고는 정상에 우뚝 선 안테나 기둥을 요령껏 피해가며 풍경 사진을 찍더니, 자기 사진에 감동한다. 그러다가 급 겸손 모드로 바뀌어서는 “이런 풍경은 못 찍을 수가 없지. 내가 잘 찍은 것이 아니라 풍경이 이쁜 거지.” 그런다.

누가 묻지도 시키지도 않았는데, 노랭이봉에 오른 감흥을 담백하게 뱉어내며 나름의 신고식을 한다. 난 그런 조카를 그냥 웃으며 바라만 본다.

정상 바위에 앉아 김밥이랑 간식을 먹으면서도 “역시 정상에서 먹으니 뭐든 맛있네.” 하며 묻지도 않는 감흥을 쏟아낸다. 그리곤 김밥을 먹다 말고 억새를 가리키며 저게 뭐냐고 물어서 알려줬더니, 옛날 사람들이 억새 잎으로 탯줄을 잘랐다는 사실을 아느냐고 묻는다. 처음 듣는 이야기다. 모른다고 사실대로 말했더니, 이모는 어떻게 그걸 모르냐며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홍경래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세도정치에 반발해 난을 일으켰던 홍경래의 출생에 얽힌 전설 같은 이야기. 홍경래가 태어나던 날, 그의 탯줄을 칼로 낫으로 아무리 자르려고 해도 잘라지지 않았는데, 누군가 억새 잎 여러 개를 겹쳐서 자르면 된다고 알려줘서 그렇게 했더니 진짜 잘라졌다는 것.

집에 돌아와서 홍경래와 억새 이야기를 찾아보니 진짜 그런 이야기가 있다.

게다가 관군이 홍경래를 잡으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안 되자 화살촉도 없는 억새줄기로 만든 활로 쏘았더니 맞고 죽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도 나온다. 그 사실 여부는 확인해보지 못했다.

아마도 홍경래를 통해 밟히고 밝혀도 쓰러지지 않고 고단한 삶 속에서도 끈질기게 살아가는 민중의 삶을 드러내고 싶어 만들어진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조카에게 홍경래와 억새 이야기를 어디서 들었냐고 물었더니 책에서 읽었단다.

이번 이야기 말고도 가끔 책에서 읽었다며 나도 모르는 식물 이야기를 들려줄 때가 있다.

7살 때까지 무릎에 앉히고 책 읽어준 보람이 있다. 요 조카는 어릴 때부터 내 무릎에 앉아 책 읽어 주는 소리 듣는 걸 좋아했다.

그리고 8살 때부터는 아주 가끔 나의 산행에 동행하기도 한다. 긴 시간 산을 함께 오르며 천천히 걷다 보면 시키지도 묻지도 않은 많은 질문과 이야기들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

조카의 나이답지 않은 고급 질문이 나올 때 놀라고, 엄마, 아빠, 동생을 너무 좋아하고, 친구랑 노는 재미 외에 별 생각 없는 어린 아이라고 생각했던 조카의 의외의 생각들에 놀랄 때도 종종 있다.

숲길을 긴 시간 천천히 걸다보면 어린 조카지만 평소와는 다른 모습이 보인다. 그럴 때면 참 잘 자라고 있구나하고 대견해진다.

또 투덜거리며 숲길을 걷다가도 어느 풍경에 꽂혀 자기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감탄사를 내뱉을 때는 누군가 강요하지 않은 무심결에 흘러나온 이런 감성이야 말로 아이의 건강한 정서를 만들어가겠구나 싶어 웃으며 바라보게 된다.

그래서일까. 이번 산행에서 정상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던 조카가 무심결에 덤덤하니 내뱉은“풍경이 이쁘긴 하네.”하던 짧은 한 마디가 너무 사랑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