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순사건 73주년 기획보도 ④]
[여순사건 73주년 기획보도 ④]
  • 지정운 기자
  • 승인 2021.10.29 16:43
  • 호수 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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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강•옥룡면, 여순사건~한국전쟁 전 피해 극심
△ 백운산희생자정령 추모비
△ 백운산희생자정령 추모비

지난 6월 역사적인 ‘여수·순천 10·19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국회 본회의에서 제정되면서 희생자 유가족들의 73년 한을 풀 계기가 마련됐다. 현대사의 비극인 여순사건은 1948년 10월 19일 발생한 이후 여수와 순천을 포함한 전남지역은 물론 전북과 경남 서부 등에도 진한 상흔을 남겼고, 특히 광양은 백운산 계곡처럼 길고 깊은 상처에 고통 받아야 했다. 특별법 제정에 맞춰 인근 도시들은 ‘여순사건’을 지역의 역사·문화적 자산으로 확보하기 위한 발 빠른 행보에 나선 모습이다. 광양시도 전문가 토론회 개최와 바로알기 교육, 지역전문가 육성, 기념 시설 건립 등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계획 단계에 머물러 있다. 이에 광양신문은 광양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된 여순사건과 한국전쟁 전후 여건과 피해 상황 등을 살펴보는 기획보도를 연재한다. 인용된 자료는 지난 2013년 광양시의회 의원 연구모임이 수행한‘한국전쟁 전·후 광양의 민간인 희생자 조사 연구 활동 결과 보고서’를 중심으로 정리했다. <편집자 주>

<글싣는 순서>

1. 73년 한 풀게 되나…‘여순특별법’제정

2. 백운산 계곡만큼 깊고 긴 아픔

3. 가장 많은 피해자 나온 광양읍

▶ 4. 전쟁 전 큰 피해…봉강, 옥룡면

5. 군경과 빨치산 양쪽에 희생…옥곡, 진상, 진월

6. 섬진강변 25㎞ 늘어선 다압면의 슬픔

7. 이젠 진실 규명·명예 회복의 길로

봉강면사무소 일원과 신촌마을·성불사

부현마을 인근 고개서 주민 집단 학살

봉강면 지역의 민간인 희생자는 전체 612명 중 51명으로, 이중 38명이 여순사건 관련 희생자다. 가해자는 군경이 27명, 빨치산과 반란군 13명, 나머지는 미상으로 파악됐다.

광양읍과 비교했을 때 가해조직 중 빨치산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다는 점이 주목된다.

광양읍에서는 134명의 희생자 중 가해조직으로 군경이 지목된 경우가 118명이었다. 시기적으로는 1948년 겨울부터 이듬해까지 피해가 막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봉강면의 주요 사건으로는 1949년 9월 신룡리 신촌 마을에서 7명의 주민이 경찰에 희생된 사건과 1949년 12월 29일 봉강면소재지에서 반란군이 야음을 틈타 지서를 습격한 사건이 있다.

봉강면의 주요 민간인 희생지 및 격전지는 면사무소와 지서가 있는 봉당리 일대, 구서리 구서다리, 신촌마을 민간인 희생지, 성불사, 옥룡면과 경계지역인 가모개재(부현마을) 등이다.

△봉당리=봉당리 일대는 현재 도시화로 인해 변형이 이뤄진 상태다. 이곳은 주요 관공서와 국방부 직할부대가 모여 있어 빨치산의 주요 습격대상이 됐다. 빨치산은 마을 주민들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고 식량 등 보금품을 조달하기 위한 습격을 감행했다. 이에 맞서 군과 경찰은 봉강면 소재지 전체에 울타리를 치고, 부역혐의자를 색출해 면사무소와 학교, 봉강지서 뒤편 하천 둑에서 처형했다.

△구서다리 일대=구서리 구서다리 일대 역시 빨치산이 자주 출몰한 지역이며 신룡리 신촌마을도 피해 지역이다. 신촌마을에 식량을 가지러온 빨치산이 술을 먹고 형제의병장 묘에서 잠을 잔 후 다음날 아침, 마을 초등학교에 경찰이 마을 주민을 모아놓은 것을 봤다. 빨치산들은 경찰을 죽이고 달아났고, 그날 오후 경찰이 와서 야경을 섰던 마을 주민 7명을 처형했다고 한다.

△성불사 일원=성불사는 백운산 정상과 구례로 가는 길목에 위치해 빨치산의 거점으로 활용된 것으로 추측된다. 군경은 잦은 빨치산의 출몰에 따라 식량탈취와 인명피해 방지, 빨치산의 보급로 차단을 위해 일명 ‘견벽청야작전’을 실시했고, 성불사는 한국전쟁 때 소실됐다.

△부현마을과 우두마을=봉강면과 옥룡면의 경계인 가모개재(가마고개·부현마을)는 1949년 9월 16일 광양읍 습격사건(일명 9·16습격사건)과 관련된다. 경찰은 좌익 협조자를 색출해 같은 해 9월 23일부터 30일까지 이곳에서 주민 30여명을 4차례에 걸쳐 집단학살했다.

광양읍과 봉강면의 경계인 봉강 우두마을(쇠머리)에서도 1949년 9월16일 습격사건과 관련, 경찰서에 좌익혐의자로 체포되어 있던 민간인들이 집단학살됐다.

백운산 골짜기 옥룡면, 빨치산 보급경로

밤엔 빨치산 낮엔 군경…주민 피해 가중

옥룡면의 민간인 희생자는 모두 88명으로 전체 희생자 중 14.3%를 차지하며 유형별로는 여순사건과 관련 피해자가 49명으로 가장 많았다. 군경토벌에 의한 희생자는 18명, 부역혐의 5명, 빨치산 1명, 형무소 3명, 기타 12명이다. 가해조직은 군경 55명, 빨치산 21명, 미상 12명로 파악됐다.

이곳 역시 가해자로 빨치산이 차지하는 비중이 광양읍 지역에 비해 월등히 높다. 백운산 깊은 골짜기에 주요 빨치산 시설들이 있었다는 점은 이들의 활동이 왕성했음을 의미하고, 군경과 대립과정에서 주민들의 희생이 나올 수 밖에 없는 구조임을 설명한다.

시기적으로는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인 1948년 겨울을 시작으로 피해가 발생해 1949년에 가장 많았고, 한국전쟁 후에는 거의 없었다.

옥룡면의 주요 사건으로는 추산리 부면장 사건과 산남리 남정마을 사건, 산남리 산본마을 사건 등이 있고 민간인 희생지 및 격전지는 옥룡면사무소, 산남리 일대, 백운사와 상백운암 전남도당 사령부 터, 남로당 전남도당 사령부 터, 동곡리 전남도당 연병장 터 등이다.

△옥룡면사무소=옥룡면사무소는 6·25전쟁 당시 백운산을 거점으로 활동하던 빨치산이 1951년에 습격해 소실됐다. 이후 신축된 옥룡면사무소에서는 당시 흔적은 찾을 수 없다.

△남정마을과 산본마을=옥룡면 산남리 남정마을과 산본마을의 민간인 희생지에서는 1949년 겨울 마을 청년들이 밤에 모여 있다가 경찰을 가장한 빨치산에게 집 앞과 마을회관에서 5명이 살해됐다. 산본마을에서는 교회 연설에서 빨치산을 비방했다는 이유로 지역의 영향력있는 인사가 산에 끌려가 희생되기도 했다.

△백운사와 상백운암=백운사와 상백운암은 여순사건으로 모두 소실됐다. 1959년 6월 구산스님이 상백운암을 중건했으며 백운사는 1960년 중건했다. 이곳은 빨치산 전남도당 사령부가 임시로 머물렀던 곳이다.

△남로당 전남도당 사령부와 연병장 터=논실마을에서 한재로 향하는 등산길을 따라 오르면 연락책 본부가 나오고, 다시 300m 정도 오르면 남로당 도당 지휘본부(일명 용숯골)가 나온다. 3000여평의 면적에 우물 2개와 교육장으로 활용됐던 선전학교 옛터 흔적이 남아있다.

전남도당 연병장 터는 논실마을에서 병암계곡 방향으로 50m 지점에 있다. 약 1000평의 부지에서 500여명의 교육이 이뤄졌다. 이곳에서는 많은 빨치산이 토벌대에게 희생됐다.

토벌 이후에는 전답으로 이용됐으며 백운산 희생자를 추모하는 ‘백운산희생자정령’ 추모비가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