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순사건 73주년 기획보도 ⑥] 섬진강 따라 25㎞ 늘어선‘다압면’희생자도 많아
[여순사건 73주년 기획보도 ⑥] 섬진강 따라 25㎞ 늘어선‘다압면’희생자도 많아
  • 지정운 기자
  • 승인 2021.11.12 16:42
  • 호수 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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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양읍 이어 가장 많은 피해자 발생
골약면, 한국전쟁 초기까지 다수 학살

지난 6월 역사적인‘여수·순천 10·19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국회 본회의에서 제정되면서 희생자 유가족들의 73년 한을 풀 계기가 마련됐다. 현대사의 비극인 여순사건은 1948년 10월 19일 발생한 이후 여수와 순천을 포함한 전남지역은 물론 전북과 경남 서부 등에도 진한 상흔을 남겼고, 특히 광양은 백운산 계곡처럼 길고 깊은 상처에 고통 받아야 했다. 특별법 제정에 맞춰 인근 도시들은‘여순사건’을 지역의 역사·문화적 자산으로 확보하기 위한 발 빠른 행보에 나선 모습이다. 광양시도 전문가 토론회 개최와 바로알기 교육, 지역전문가 육성, 기념 시설 건립 등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계획 단계에 머물러 있다. 이에 광양신문은 광양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된 여순사건과 한국전쟁 전후 여건과 피해 상황 등을 살펴보는 기획보도를 연재한다. 인용된 자료는 지난 2013년 광양시의회 의원 연구모임이 수행한‘한국전쟁 전·후 광양의 민간인 희생자 조사 연구 활동 결과 보고서’를 중심으로 정리했다. <편집자 주>

 

<글싣는 순서>

1. 73년 한 풀게 되나…‘여순특별법’제정

2. 백운산 계곡만큼 깊고 긴 아픔

3. 가장 많은 피해자 나온 광양읍

4. 전쟁 전 큰 피해…봉강, 옥룡면

5. 군경과 빨치산 양쪽에 희생…옥곡, 진상, 진월

▶ 6. 섬진강변 25㎞ 늘어선 다압면의 슬픔

7. 이젠 진실 규명·명예 회복의 길로

 

△ 기다란 광양시 다압면(다음지도 캡쳐)
△ 기다란 광양시 다압면(다음지도 캡쳐)

다압면

다압면의 민간인 희생자는 총 91명으로 전체 희생자 612명 14.8%을 차지한다.

다압면은 광양시의 동북방향에 25㎞나 길게 늘어선 지역으로, 백운산 자락을 뒤로하고 섬진강변을 따라 마을이 형성돼있는 지리적 특징을 보이며 광양읍 지역(134명) 다음으로 희생자가 많이 발생했다. 희생자의 50% 정도가 여순사건 관련이고, 한국전쟁이 시작된 이후에 이뤄진 군경 토벌에 의한 희생자가 23명이 될 정도로 오랜기간 토벌작전이 진행된 곳이다.

다압지역에서 발생한 주요 사건은 1950년 7월 29일 미군에 의한 폭격사건이 있다. 이로 인해 신원리 주민 6명이 희생 당했다. 이 지역의 주요 민간인 희생지와 격전지는 고사리 다압면사무소, 고사리 다압지서, 신원리 신원지서, 고사리 국군주둔지, 금천리 염창마을 민간인 희생지, 염창마을 감호정, 고사리 민간인 희생지 등이다.

△다압면사무소=현재 신축된 면사무소가 있다. 한국전쟁 당시 백운산을 거점으로 활동하던 빨치산이 1951년에 다압면을 습격해 소실됐다.

△다압지서=현재는 다압치안센터와 민가가 들어서 있는 곳이다. 여순사건 당시 빨치산의 습격으로 소실되어 다압초등학교 앞으로 옮겨졌다. 여순사건과 한국전쟁 때 부역자 색출이란 미명하에 마을 주민들을 잡아 가두고 취조했고, 이곳 주변에서 많은 주민들이 학살됐다.

△고사리 국군 주둔지=이곳은 현재 다압초등학교가 있다. 국군 제12연대와 경찰 2030부대가 주둔했다. 제12연대는 섬진강 건너 경남 화개면에 본부를 두고 백운산 토벌 때마다 이곳에 주둔해 부역자를 색출한다며 마을 주민들을 잡아 가두고 취조해 많은 주민을 학살했다.

△금천리 염창마을과 감호정=금천리는 백운산 능선 중심의 산악지역으로 빨치산의 주요 배후마을로 분류된다. 한국전쟁 때 광양군 인민위원장과 다압면 인민위원장을 역임한 이들의 출신지역이다. 여순사건 당시 섬진강 건너 화개마을에 주둔하고 있던 제12연대가 자주 마을에 들어와 반군 소탕작전이라는 이유로 주민들을 마을 회관에 모아 부역자를 색출해 죽였다.

염창마을 감호정은 현재 김씨 제각으로 사용되고 있고 변형된 상태다. 감호정은 1839년 건립된 후 1860년, 1900년에 거듭 중건됐다. 이에 대한 기록은 1925년 간행된‘광양군지’와 매천 황현이 지은‘감호중건기’에 남아있다.

△고사리 민간인 희생지=항동 마을 뒤편 산골짜기로 현재는 과수원으로 이용된다. 다압면소재지에 있는 이곳은 국군 제12연대와 경찰 2030부대가 주둔하면서 다압면 일대 부역자나 좌익으로 체포된 민간인이 취조를 당하고 황금쟁이 모퉁이와 복성골 주변에서 희생됐다.

△신원리 미군폭격기 피해지=다압면 신원리의 내압과 외압, 신기마을이 해당된다. 1950년 7월 25일 미군이 인민군의 장갑차 부대를 폭격하기 위해 신기마을 근처에 폭탄을 투하했고 이때 마을 주민 6명이 희생됐다. 같은 해 10월에는 빨치산들이 내압과 외압마을에 내려오는 것을 발견한 미군이 총격을 가했고, 날아든 총탄에 마을 주민들이 희생됐다.

 

골약면

당시 골약면은 현재의 골약동과 중마동, 광영동, 태인동, 금호동을 아우르는 지역으로 민간인 희생자는 총 55명으로 집계됐다. 이 지역 역시 여순사건과 관련된 피해자가 50%를 차지한다. 시기적으로는 한국전쟁 이전의 피해가 50% 가량이다. 1950년 이후에는 피해자가 확연히 줄어 치안력이 타 지역에 비해 빨리 꾸준히 확보된 것으로 보인다.

골약면의 주요사건은 황길리 통사마을의 빨치산 연락책 가족 4명이 1949년 1월께 광양경찰서로 끌려가 학살된 일이 있다. 또 황금리에서는 14연대 소속 사병이 마을로 숨어있던 것을 이장이 신고해 숨겨준 이의 가족들이 1949년 3~4월께 광양경찰서에 끌려가 학살당했다.

특이 사건으로는 국군 1개 중대가 옥곡면 원월리 길로 가야 하는데 지도를 잘못보고 재동마을로 들어왔고, 이를 본 반군이 부대를 따라와 교전을 벌여 양측에서 각각 1명의 전사자가 나왔다.

중양마을 부근에서는 여순사건 시기에 반군과 경찰의 교전이 있었다. 힘에 부친 경찰을 지원해 15연대 지원병력이 30여대의 트럭을 타고 왔고, 이 부대가 마을 부근 솔티재를 통과할 무렵 잠복하고 있던 반군이 기습해 군인들이 큰 피해를 입었다.

골약면의 주요 민간인 희생지 및 격전지로는 골약면사무소와 골약지서, 기동마을 뒤 인민군 참호터, 통사마을 민간인 희생지 등이 있다.

△골약면사무소와 골약지서=새로 신축돼 면사무소로 이용돼 왔으나 현재 도시개발로 사라졌다. 1949년 5월 2일 빨치산이 마흘마을을 공격했을 때 야경을 섰던 주민이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않았다고 골약지서로 연행돼 학살됐다.

1951년 1월 14일 빨치산의 관공서 습격 당시 골약면사무소와 골약지서가 전소돼 면사무소에 보관된 호적부 등이 사라졌다.

△기동마을 뒤 인민군 참호터=현재는 흔적이 없이 변형됐다. 1950년 7월 28일 인민군이 골약면 성황초등학교에 주둔했고, 10월 1일 밤 후퇴했다. 이 기간 동안 기동마을 뒤 산자락과 하포가 내려다 보이는 야산 일대, 즉 염포에서 광포에 이르는 해안선을 따라 넓이 1m, 깊이 1.5m의 참호가 구축됐다. 이는 한국전쟁 시기 후방에서 인민군에 의해 주민이 동원된 대표적인 사례로 알려져 있다.

△통사마을 민간인 희생지=현재는 흔적이 없다. 1949년 1월 광양읍에서 반군과 관련이 있는 주민이 통사마을을 방문하자 경찰이 마을을 급습해 가족 4명을 살해하고 피해를 입혔다. 뒤이어 경찰은 마을 주민들을 밭으로 집결시켜 위협하고 구타했으며 이로 인해 주민 3명이 병을 얻어 숨졌다. 한국전쟁 시기에 골약면에 진주했던 인민군 일부가 통사마을 정자나무 옆 숲에 포를 설치하고, 국군의 하포 상륙에 대비했으며 바로 옆 저수지에서 사격훈련을 실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