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안순심 숲해설가(숲마루)
[기고] 안순심 숲해설가(숲마루)
  • 광양뉴스
  • 승인 2022.01.14 17:28
  • 호수 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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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제트식물, 늦깎이 곤충들의 사회안전망 -스물 한번째 이야기-

추운 겨울, 씨앗이 되어 땅속에 꼭꼭 숨어드는 대신 지상에 잎을 활짝 펼친 채 흙바닥과 하나가 되어 겨울과 온전히 맞서는 로제트식물. 로제트식물은 가을에 미리 싹이 트는 식물로 뿌리에서 난 잎이 흙바닥에 방석처럼 잎을 펼치고 햇빛을 받아 광합성을 하며 겨울을 난다. 이른 봄 우리네 밥상에 나물이나 된장국으로 흔히 올라오는 냉이가 대표적인 로제트식물이다. 

우리 집 근처 가야산 자락을 허물고 아파트를 짓고 건물터를 다듬어 놓은 빈 터에 다양한 콩과 초본 식물과 벼과.사초과 초본식물 등이 터를 잡았다. 그 틈새로 달맞이꽃, 망초, 개망초 등 여러 로제트식물이 자리를 잡고 있다.

동지가 하루지난 겨울의 도시 빈터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달맞이꽃과 망초의 진딧물. 망초 잎에서 진딧물 사이로 늦깎이 칠성무당벌레 애벌레들을 발견한다. 녀석들 중에 한 마리가 진딧물을 사냥해 먹는다. 칠성무당벌레는 성충으로 겨울을 나는데, 늦깎이 애벌레들은 무사히 성충이 될 수 있는 걸까? 당분간 녀석들을 보러 공터로 나오는 일이 중요한 하루 일과가 될 것 같다.

바로 옆 망초에 진딧물을 먹는 성충 칠성무당벌레와 빈 번데기도 보인다. 늦은 우화를 한 뒤 월동에 들어갈 준비를 위한 영양 보충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진딧물 입장에서는 불행이지만 늦깎이 성충 칠성무당벌레는 진딧물 덕에 영양을 보충하고 월동 장소를 찾아 추운 겨울을 잘 버티고, 봄에 새로운 삶을 시작할 확률이 높다.

그리고 다시 또 다른 망초 잎에서 진딧물을 먹는 꽃등에류 애벌레도 한 마리 만난다. 역시 진딧물을 사냥해 먹고 있다. 애벌레로 월동을 한다면 진작 월동 장소로 숨어들어 죽은 듯 깊은 잠에 빠져 있을 시간인데, 아직도 먹이 활동을 하는 걸 보면 이 녀석도 생사를 건 절박한 상황인 것 같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진딧물은 피해자, 다른 곤충들은 가해자로 느껴질 것 같다. 그런데 그게 꼭 그렇지는 않다. 진딧물은 알이나 성충으로 월동을 한다. 결국 아직까지 망초의 즙을 빨아 먹으며 무리지어 살고 있는 진딧물들 역시 생존이 절박한 늦깎이들이고 망초에게 큰 신세를 지고 있는 중이다. 그러니 진딧물은 피해자로 단정할 수 없다. 그저 망초를 중심으로 한 작은 생태계가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다행이 진딧물에게 영양을 뺏긴 망초도 좀 힘들기는 하겠지만 죽지는 않는다. 더 강한 추위가 닥치면 망초 잎에 살던 곤충들도 사라질 테니.

이른 봄에 로제트 식물을 볼 때면 그 식물의 생존전략의 영리함이 놀라웠다. 그런데 겨울 로제트식물과 마주하며 살짝 감동한다. 가을이면 다른 풀들은 씨앗의 상태로 땅속에서 겨울잠을 준비한다. 그런데 로제트식물들은 오히려 싹을 내고 잎을 키워 흙바닥에 딱 펼치고 해 바라기를 하며 추위와 건조를 견디고, 차가운 바람을 피하며, 빛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당을 만들어 잎이 얼지 않게 한다. 봄이 되고 나서야 발아하는 식물들보다 먼저 장소를 선점해서 성장에 유리한 위치를 차지할 수도 있다. 로제트식물이 불리한 환경을 극복하고 생존하기 위해 치열하게 짜낸 전략 덕에 다른 곤충들이 그 노력의 결과에 기대어 삶을 의지하고 있다. 

곤충의 세계에도 다양한 이유로 정상적인 성장의 기회를 놓치고 제때 어른벌레가 되지 못하고 생존의 위기에 내몰린 어린 벌레들이 많을 것이다. 내가 만난 칠성무당벌레, 꽃등에, 진딧물처럼. 그들에게 망초는 그야말로 삶의 마지막 희망이다. 망초가 의도한 건 아니지만 망초는 늦깎이 곤충들의 마지막 생명선이 되고 있다. 그런 면에서 망초는 절박한 늦깎이 곤충들의 소중한 사회안전망 역할을 한다.

자연의 시간에서 뒤처진 어린 곤충들에게는 잘못이 없다. 녀석들이 그러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닐 테니. 그저 운이 나빴을 뿐이다. 그러니 늦깎이 곤충들에게 한 번쯤은 다시 삶을 설계할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망초가 바로 그 곤충들에게 그런 소중한 기회다. 초겨울 망초 잎에서는 거대한 생태계 속의 또 다른 작은 생태계가 돌아가고 있다. 거대한 생태계와 충돌하지 않고 오히려 충만하게 만든다.

숲에서 3년 놀아보니 자연에는 이런 사회안전망이 다양하게 존재하는 것 같다. 그래서 자연은 신비로운 세계다. 인간 세계에도 이런 다양한 사회안전망이 존재한다면 훨씬 살만하고 아름답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