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삶] 지친 마음에 따뜻한 죽 한 숟가락
[사람과 삶] 지친 마음에 따뜻한 죽 한 숟가락
  • 광양뉴스
  • 승인 2022.03.11 17:30
  • 호수 94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양임
•광양YWCA 이사
•국방부 / 여성가족부 양성평등교육 진흥원 전문강사

얼마 전 지인과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중 그분이 아련한 눈빛으로 이런 얘기를 하셨다.

중학교 다닐 때 같은 반 친구가 자신의 진로에 대해 진심 어린 조언을 해 줬는데 거기다 대고 “너나 잘해”라고 했다는 것이다. (아마도 자신이 생각하는 진로와 친구가 조언했던 방향이 달라서였던 것 같다고)

졸업 이후 서로 어디서 어떻게 사는지 모르는 체 수십 년이 지났지만 자기가 너무 심했던 것 같아 내내 마음에 걸렸었는데 최근 여기저기 수소문 끝에 그 친구의 연락처를 구해 지금은 광주에 살고 있는 그 친구에게 전화로 기억을 되살려가며 그때 일을 사과했는데 정작 그 친구는 그 일을 기억조차 못하고 있더라는...

우리는 살면서 의도가 있든 없든 무심코 내뱉은 말 한마디로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또 상처를 받기도 한다.

그런데 누군가 사소하게 여기고 지났던 일을 오래토록 마음에 두고 미안해 하다가 수십 년이 지난 어느 날 일부러 나를 찾아 사과를 하는 느낌은 자극적인 음식들로 불편해진 위장에 따뜻한 죽을 먹은 느낌이 아닐까?

그 느낌을 나도 맛보고 싶다. 왜냐면 나에게도 오랫동안 마음속에 담아 둔 미안한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국민학교 2학년 무렵의 기억을 소환해 보려고 한다.

그 시절에는 딸을 학교에 보내지 않고 남의 집 애 보는 아이로 보내거나 남의 집 일을 거드는 아이로 보내는 일이 드물지 않게 있었는데, 나보다 한 두 살 정도 많을 것 같은 언니가 아기를 업고 날마다 유리창 밖 화단 너머에서 교실을 들여다보고 서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고학년 남자아이들이 그 언니에게 짓궂은 장난을 쳤던가 보다. 웅성웅성 둘러서 있는 아이들 가운데 그 언니가 땅바닥에 주저앉아 울고 있었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건 자기를 업고 있던 누나가 우니까 놀라서 따라 우는 아기를 달래려고 그 언니가 주머니에서 꺼내 아기한테 쥐어주던 조그만 플라스틱 토끼 인형과 그 언니가 무심코 만지작거리다가 손가락에 물들게 되었을 푸르스름한 코스모스 이파리 풀물 색깔이다. 그런데 그걸 왜 아직까지 마음에 담아 두었냐고?

나도 웃었거든... 그 둘러선 아이들 사이에서 나도 함께 웃었거든... 결코, 절대, 웃으면 안 되는 일이었는데 함께 웃었다는 그 사실이, 그리고 함께 교실에서 어울리지도 못하고, 창 너머로 공부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날마다 그 언니는 무슨 생각을 했을지... 짓궂은 장난에 달아나지도 못하고 땅바닥에 주저앉아 울면서 그 언니 심정은 어땠을지... 그날 이후 보이 지 않는 그 언니가 가끔 궁금했지만 그렇게 잊고 산 줄 알았는데... 살면서 생각할 때마다 눈물이 나고 가슴이 아팠다.

이제는 환갑을 훌쩍 넘었을 그 언니가 어떻게 살아왔고 어떻게 살고 있을지 전혀 짐작도 할 수 없지만 헤아릴 수 없는 미안함으로 그 언니를 기억한다.

서두에 얘기한 지인이야 이름도 알고 같은 학교를 다녔으니 마음만 먹으면 상대방을 찾을 수 있었겠지만 나는 그 언니의 이름도, 나이도, 사는 곳도 전혀 모르는 상태라 막연할 뿐,

“잘 살고 계시죠? 정말 미안했습니다. 미안합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혀에 치명적인 독을 품고 수없이 다른 이들에게 상처를 주고 영혼을 파괴하면서도 무감각한 사회가 되어 버렸다.

“내가 언제?” “그래서, 어쩔건데?”

이런 자극적인 관계들 속 예민하고 불편해진 우리의 마음에 오늘은 따뜻한 죽 한 숟가락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