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들, 대책위원들 사퇴시키고 협상안 무효 선언
이튿날 아침이 되자 이 소식을 들은 주민들이 속속 대책위 사무실로 몰려들었다. 이들은 주로 1구 도촌마을과 2구 장내마을 부녀회원들이었다. 이들은 맞이한 사람은 대책위의 결정을 끝까지 막으려 했던 배훈 부위원장이었다. 이들 주민들은 찬성표를 던진 대책위원들을 불러오라며 호통을 쳤다. 이들은 대책위원들의 결정은 물론 그런 결정을 한 대책위원들을 절대로 인정할 수 없다며 대책위원들이 나와서 주민들 앞에 무릎을 꿇고 사죄하고 대책위원직을 사퇴하라고 요구했다. 이들의 농성은 오후 늦게까지 이어졌지만 대책위원들은 이날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이날 약속된 회의가 열리지 않자 주민들은 다시 대책위 사무실로 가 왜 회의를 열지 않느냐고 거세게 항의했다. 주민들은 결국 30일 오후 4시에 다시 회의를 열겠다는 약속을 김 위원장으로부터 받아냈다. 이날 대책위사무실에 모여 있던 주민들은 포스코 이구택 회장을 비롯한 임원진들이 백운대에서 내년도 경영전략토론회를 열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회장을 만나러 가자면서 백운대로 향했다. 주민들은 오후 4시 10분부터 40여 분간 백운대 입구 도로에서 차량으로 막아선 포스코 경비직원들과 대치하기도 했다.
그동안 주민대책위를 중심으로 단일한 대오를 형성, 포스코와 맞서오던 태인동 주민들은 지난달 23일 이후 맞서 싸워야 할 포스코를 제쳐두고 그동안 주민을 대표해 협상을 이끌어왔던 주민대책위 위원들을 상대로 싸움을 벌이고 있다. 포스코를 상대로 했던 싸움이 주민과 주민대책위원회 간의 싸움으로 전환돼버린 이 기막힌 현실에 이르기까지 어떤 일이 있었는가?
지난달 23일 오후 6시 태인동환경개선주민대책위원회(이하 주민대책위)는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 주민대책위는 이날 포스코 측이 주민들의 환경개선 및 피해보상 요구에 대한 답으로 제시한 네 가지 지역협력사업방안 수용여부를 20명의 대책위원들의 투표로 결정했다. 투표결과는 수용찬성 15명, 수용반대 4명, 기권 1명으로 나왔다. 이날 반대표와 기권표를 던진 사람은 포스코 제시안이 태인동 주민들의 요구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은 미봉책이어서 받아들일 수 없다고 주장한 사람이거나 수용여부를 대책위원만의 투표로 결정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 사람이었다.
포스코가 태인동에 제시한 네 가지 지역협력사업안은 △연매출액 60~70억원, 채용직원 100명 규모의 포스코 아웃소싱기업에 태인동 주민 참여보장 △지역공익사업기금 20억원 지원 △나눔의 집 운영과 태인동 주민행사지원금 등 5억원 계속 지원 △포스코 연관기업에 태인동 주민 적극 채용 약속으로 확인된다.
20명으로 구성된 주민대책위원 중 15명은 왜 이 정도에서 만족하고 싸움을 마무리 짓자고 했을까? 15명의 대책위원들은 이 네 가지가 지난 18년 동안 제철소로 인해 환경피해를 받아온 태인동 주민들에 대한 정당한 보상이 될 수 있다고 과연 생각했던 것일까?
물론 아니다. 15명 대책위원들이 왜 그런 선택을 하게 되었는지는 지난 25일, 전날부터 대책위에 항의하기 위해 대책위 사무실로 몰려든 주민들에게 밝힌 김재신 위원장의 답변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상자기사 참조>
그러나 이후 광양시는 “국가산단이기 때문에 환경부가 이를 조사해야 한다고 환경부에 건의를 제출해 환경부로부터 ‘광양산단의 건강영향조사 계획수립 및 착수에 필요한 예산을 국립환경연구원에 반영하겠다’는 답변을 받았기 때문에 시 차원에서 조사할 필요가 없다”면서 용역조사비 집행을 미루고 말았다. 시는 특히 지난 3월 30일 첫 실무협의회를 가진 것을 시작으로 주민대책위와 산단기업, 광양시 3자가 참여한 광양산단환경개선협의회가 구성된 이후에는 3자 협의라는 틀 안에 갇혀 더욱 움츠려드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포스코와 태인동 주민간의 관계를 개선할 수 있는 결정적인 절차인 주민건강역학조사 실행에서 시가 발을 빼버리자 주민대책위는 건강역학조사라는 멀고 험한 길 보다는 지역협력 차원의 협상이라는 쉬운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의 결과가 지난달 23일 대책위원의 투료로 결정됐고 또한 그 투표의 결과는 주민과 주민대책위 간의 싸움으로 전환되는 형국을 만들고 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