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월 대보름의 단상
정월 대보름의 단상
  • 광양신문
  • 승인 2006.09.13 11:15
  • 호수 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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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적 정월대보름 아침은 동네 아저씨나 친구의 "수영아~" 부르는 소리에 잠을 깨곤 했다.

잠이 덜 떨어진 눈을 비비며 "왜?"하고 물으면 그들은 "내 더위"하고는 냅다 도망쳐 버렸다. 아뿔싸. 어제 저녁까지만 해도 부모님께서 내일 아침 해 뜨기 전에 누군가 너를 부르거든 절대 대답해서는 안된다는 심신당부를 잊은 채, 나는 번번이 그들의 더위를 대신 먹을 수밖에 없었다.

천관우 선생은 '일년 열두달 명절이 적지 않지만 대보름 전후 며칠 만큼은 세시의 습속이 많은 듯하여 줄다리기 연날리기 더위팔기…, 누구나가 아득한 기억을 헤쳐나가면서 회상에 잠길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크리스마스에, 신정에, 설에 삼중과세를 한다는 우리들이 갈수록 이러한 아늑한 습속에 굶주려가는 것은 어찌된 일일까?'라고 했는데, 도깨비놀음 같은 밸렌타인 데이는 알아도 대보름의 정감 넘치는 습속은 어이 내팽겨치려 드는 지 알 수가 없다.

집안에 노인이라도 있으면 귀밝이 술을 마시고 이가 튼튼하고 부스럼이 나지 말라고 부럼을 깨뜨린다. 유난스러운 집 같으면 오곡밥에 취나물로 복쌈을 싸 먹기도 하고, 하다못해 호박고지 무시래기를 삶아 입맛을 돋웠다. 무적섬은 조무래기들 차지였다. 구멍을 낸 깡통에 숯불을 담아 "달이야 불이야"를 외치며 돌렸다. 어둠 속에 수많은 보름달이 그려지는 장관이란, 우리들만의 불꽃, 그 아름다운 축제를 어찌 잊으랴.

봄 맞이 축제로 서양에 카니발이 있다면 우리에겐 대보름이 있다. 이때 쯤이면 겨울숲은 잔기침을 하면서 한꺼풀씩 깨어난다. 들판엔 온갖 나물이 고개를 내미는 때다. 풍물로 겨울잠을 깨우고 한 해의 풍년과 안녕을 비는 대보름은 '봄의 제전'인 것이다.

머지않아 숲에는 수런수런 신록의 문이 열릴 것이다. 그러나 유독 사람 사는 세상만은 아직 한 겨울이니 어찌된 일인가. 거리를 걷고 있는 행인들의 어깨는 여전히 서늘하다. 봄소식이 없는 것은 아니다. 경기가 살아날 조짐을 보인다는 얘기가 곳곳에서 떠들썩하다.

설을 전후로 백화점 매출이 급증했고 기업의 설비투자도 회복기미를 보인다고 한다. 지난 해 순이익 100억 달러 그룹에 가입한 어느 기업은 푸짐한 보너스를 나눠줬는데도 태평가는 들리지 않고 분노에 가득찬 농민과 실업자들의 고성만 차디찬 거리를 메우고 있다.

만나는 사람마다 사는 재미가 없다고들 한다. 얼굴마다 수심이 서리고 굳어 있다. 이것이 1만 달러 시대의 얼굴인가. 내 입에서도 곧잘 재미없는 세상이란 소리가 새어나온다. 이 풍진 세상이 언제는 배두드리며 태평가를 부르던 신나고 재미있는 세상이었던 것 처럼. 어차피 우리가 사는 세상은 천국이 아닌 사바세계(娑婆世界)다. 사바세계란 범어(梵語)로 '참고 견디며 살아가는 세상'이란 뜻이라고 한다. 참고 견디며 살아오는 데 이골이 난 우리 아닌가. 또 참고 견디며 살아가는 수밖에.

그래도 세상살이가 이처럼 재미없는 건 많은 부분 정치의 책임이다. 정치라는 게 뭔가. 어려운 이론을 들먹일 것도 없이 시민들이 희망을 갖고 살게 하는 것 아닌가. 희망이 없으니 재미가 있을 리 없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지방자치시대의 주인은 지역주민이다. 우리의 지방 자치는 아직도 정착단계에 들어서지 못하고 있다. 집행부와 의회가 곳곳에서 충돌하는 등 상당한 시행착오를 겪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희망은 본래 시민의 것이다. 희망을 주기는 커녕 희망을 빼앗는 정치는 범죄다.
 
입력 : 2005년 10월 1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