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양인과 백운산 그리고 송전탑 (서종탁)
광양인과 백운산 그리고 송전탑 (서종탁)
  • 광양신문
  • 승인 2006.09.13 11:22
  • 호수 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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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종탁 / 전 광양교육장
‘억불봉과 도솔봉 거느리고서 백운산이 우리를 지켜봅니다’(이하생략)
필자의 모교인 옥룡초등학교 교가의 첫구절이다.

‘거룩한 뫼 백운의 정기 뻗치고 남해의 고운물결 뜰에 빛나네’.(이하생략)
역시 모교인 광양중학교 교가의 첫구절이다.

‘백운산 높이 솟아 가람은 맑고 섬진강 구비돌아 기름진 언덕’(이하생략)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처음 발령을 받았던 진상초등학교 교가의 첫구절이다.

이처럼 광양의 초, 중, 고등학교 교가에는 ‘백운산’이라는 이름이 들어있지 않은 학교가 없을 것이니 광양인들은 청소년 시절부터 백운산과 함께 백운산의 정기를 받고 자란다.

필자가 초등학교 다닐 때의 백운산은 여ㆍ순사건으로부터 6ㆍ25전쟁까지 빨치산의 근거지였기에 날마다 포성과 총성이 울리는 백운산을 바라보며 살아야 했고 밤이면 빨치산들이 내려와 식량을 약탈해 갔기 때문에 불안의 나날을 보내야만 했었다.

중학교에 다니면서부터 백운산에 평화가 깃들었고 10리 길은 날마다 통학을 하면서 등굣길에는 백운산을 등지고 바쁘게 달렸고 하굣길에는 느긋한 마음으로 백운산을 바라보면서 귀가를 하였다.

백운산은 상봉에서부터 왼팔을 쭉 뻗어 주먹을 쥔 듯한 억불봉(바구리봉)까지 길게 뻗은 줄기가 때로는 웅장하게 보이기도 했고 때로는 인자한 모습으로 보이기도 했다.

지금은 공해에 찌들려 아지랑이도 보이지 않지만 봄이면 백운산에 어리는 아지랑이가 눈부시게 옥룡벌로 흩어 퍼졌고 여름이면 백운산 허리를 감아 도는 흰 구름이 ‘아하! 저래서 백운산이구나’ 하고 감탄할 정도로 한 폭의 동양화처럼 아름답게 보였다. 가을이면 정상에서부터 아래쪽으로 드리워지는 붉은 단풍으로 온 산이 활활 불타는 듯 했으며 겨울이면 백설을 이고 우뚝 솟은 백운의 영봉이 장엄하게 보였다.

백운산은 광양인에게 높은 이상과 큰 포부를 안고 살아가도록 가르친다. 필자가 백운산 정상을 처음 밟아본 것은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의 겨울방학 때였다. 친구들과 함께 백운사에서 자고 다음날 아침 상봉을 오르는데 눈이 많이 쌓여 무릎까지 빠지는 눈 속을 헤쳐 정상에 도착했을 때의 그 감격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북으로는 지리산이 천왕봉, 반야봉, 노고단, 왕시루봉 등을 거느리고 병풍처럼 둘러있고 동으로는 섬진강이 남색비단폭을 두른 듯 하동과의 경계를 이루며 시원한 악양들이 펼쳐보이며 서쪽으로는 조계산 넘어 무등산이 가물가물 보였다. 남으로는 옥룡 푸른 바다가 호수처럼 잔잔했다.

백운산은 광양 전체를 감싸 안으며 두 팔을 벌린 자세에서 오른쪽 팔을 굽혀 따리봉, 도솔봉, 형제봉을 거느리고 왼팔을 쭉 뻗어 억불봉과 매봉을 거느리면서 남으로 뻗어 내린 4개의 주정맥이 시계와 면계를 이루고 있다.

동남으로 뻗은 제1정맥은 매봉에서부터 남으로 갈미봉, 불암산을 거쳐 진상면과 다압면, 진상면과 진월면의 면계를 이루면서 망덕산에서 잠간 멈췄다가 바다건너 태인산까지 이른다.

제2정맥은 억불봉에서 남으로 뻗어내려 옥룡면과 진상면, 옥룡면과 옥곡면의 면계를 이루면서 갈밭등, 대치재, 국사봉을 거쳐 마로산성에서 잠간 쉬었다가 구봉산에서 가야산까지 뻗어가면서 골약동과 중마동을 얼싸안는다. 곰재에서 갈라진 일맥은 옥곡면과 진상면의 면계를 이루며 금이리 뒷산까지 이른다.

제3정맥은 형제봉에서 남으로 뻗으면서 옥룡면과 봉강면의 면계를 이루며 내우산에 머물러 광양읍을 안고 있다.

제4정맥은 월출재에서 남향을 시작하여 계족산, 일자봉까지 순천시와 시계를 이루면서 서산너머 반송재를 거쳐 순천의 봉화산, 삼산까지 이르고 남으로 여수반도까지 뻗어 내렸다.

보라! 백운산 정상에서 바라보면 옥룡면 답곡리에서부터 중마동, 태인동까지 광양시 어느 마을 하나 백운산의 숨결이 닿지 않는 곳이 있는가를... 광양시 마을마다 한마을 빠짐없이 백운의 정기를 쏟아놓고 있지 않는가? 골골마다 큰 산과 명산은 많아도 백운산처럼 그 고을 한 마을도 빠짐없이 전체를 감싸주는 산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 광양인은 뒷산에 어리고 때로는 앞산에 어린 백운의 정기를 받고 자라면서 높은 이상과 큰 포부를 가슴에 안고 이 나라의 동량대로 자라는 것이다. 백운산은 광양인에게 줄기찬 의지와 끈기를 길러준다.

군대입대를 며칠 앞두고 함께 입대하는 세 명의 친구와 함께 두 번째로 백운산을 찾았다. 지금처럼 등산이 보편화되지 못해서 등산장비가 없었기 때문에 군용배낭에다 냄비와 식량을 짊어지고 정상 아래에 있는 상백운암에 도착했을 때는 저녁 어스름이 깃들고 있었다.

암자에는 방이 두개 있고 40대쯤 되는 스님이 한 분 있었는데 그 스님은 도를 닦고 있기 때문에 등산객을 재울 수 없다고 문전 축객을 하였다. 군입대를 앞두고 고향의 명산을 찾아 가슴에 새기기 위해 의미 있는 등산을 왔으니 재워달라고 사정을 해도 안 된다고 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수도하시는 스님이 어두워지는 깊은 산속에서 불쌍한 중생들을 쫓아내서 되겠습니까? 하룻밤 잡시다.” “여기서는 도를 닦고 있는 수행중이라 안됩니다.”  “도를 닦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부처님의 가르침을 깨우치려는 것이 아닙니까? 부처님의 가름침은 대자대비가 아닙니까?” “그래도 도를 닦는 기간에는 일반인들을 들일 수 없게 되어있습니다.”
이런 공방이 30여분이나 계속되었다.

“야, 저런 땡땡이 중놈을 밀어내 버리고 그냥 자자”  친구들이 화가 나서 힘으로 밀어붙이려는 것을 제지하고 모든 상식과 지식과 성의를 동원해서 끈기 있게 설득을 했더니 “젊은이의 성의에 감복해서 내가 졌소” 하면서 받아주었다.

교통도 불편하고 전화도 없던 시절이라 군 입대를 앞둔 젊은이들이 행패를 부리고 강제로 잔다고 해도 어쩔 수 없었을 텐데 그토록 고집을 부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스님 한분 설득을 못 시켜 앞으로 험난한 세상을 어떻게 헤쳐 갈 것인가?’ 하는 자존심이 끝내 이긴 것이다.

‘도를 닦는 스님이 웬 고집이 저렇게 세고 인심이 사나울까?’ 하고 반질반질한 이마가 밉게 보이던 스님도 결국 고집을 꺾었고 밤에는 우리가 드리는 공양을 웃으며 받아들였으며 여러 가지 좋은 이야기도 많이 해 주었다.

다음날 떠날 때는 ‘군 생활을 무사히 마치기를 축원한다’ 는 인사와 함께 ‘옴마니반메흠’이라는 글귀가 적힌 부적 같은 종이를 하나씩 주면서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주문을 외우라고 했다.

그 후 군 생활을 하는 동안이나 사회생활을 하면서 어려움에 부닥쳤을 때는 ‘옴마니만메흠’을 읊조리면서 백운산을 생각하였다.

고향을 떠나 생활할 때 고향을 생각하면 맨 먼저 백운산이 생각나고 백운산 정상에 올랐을 때의 그 감동과 함께 용기가 생기고 어려움을 참게 되는 것은 필자만이 아닌 광양인 모두가 다 느끼는 바일 것이다.

백운산은 광양인에게 잘 사는 터전과 풍요로움을 가져다주었다. 60년대까지 찢어지게 가난했던 시절을 지나 70년대부터 광양인들은 백운산 기슭을 개척하여 밤나무, 감나무, 매화나무를 심고 약초를 심는 등 소득증대를 위해 힘써왔다.

그 결과 지금은 백운산을 중심으로 한 산골에서는 고로쇠나무에서 약수를 채취하여 관광수입을 올리고 있으며 다른 마을에서는 과일나무를 가꾸어 소득을 올리고 있다. 이것은 백운산의 알맞은 기후와 기름진 땅이 가져다주는 결과인 것이다.

광양시에서는 많은 예산을 들여 백운산 기슭에 있는 도선국사지를 복원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고 체험학습장을 만들어 1100백여 종의 각종 식물이 분포하고 있고 희귀동물이 서식하고 있는 천혜의 생태보고인 백운산을 자랑스런 터전으로 개발하고 보전하려 하고 있다.

필자가 광양교육장으로 재직 시 매년 1월1일 새해 첫날에 기관장과 유지들이 아침 7시에 현충탑 참배를 마치고 눈 쌓인 백운산 정상에 올라 광양시의 무궁한 발전과 시민들의 복된 내일을 기원하는 제를 올리고 애국가를 힘차게 부르는 모습을 보고 이는 다른 고을에서는 볼 수 없는 광양인의 독특한 애향심, 그 기질적 우세라는 자부심을 가졌었다. 이처럼 백운산은 광양에 살고 있는 시민이안 출향 향우들을 포함해서 모든 광양인의 꿈이요 요람이요 자존심이다. 어머니의 품속 같은 포근한 우리의 보금자리이고 미래이다.

그런데 이런 백운산이 요즈음 위기에 봉착하고 있다.

한전이 345KW급 신강진-광양간 송전선로 건설사업을 추진하면서 백운산 지역에만 44기의 송전탑 건설을 추진하고 있어 이것이 실행된다면 백운산의 자연경관 및 생태계가 파괴들 것이라는 우려 때문에 옥룡면민들을 필두로 하여 반대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물론 산업발전을 위해 송전로 건설사업은 필요하겠지만 다른 방법을 모색해야지 백운산을 중심으로 한 송전탑 건설계획은 전면 재검토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제가 한국인의 기상을 꺾기 위해 전국 명산에다 철근을 박았다고 한다.

그런데 광양인 모두가 정기를 받고 있는 백운산에다 44기의 송전탑을 세워야 되겠는가? 송전탑 건설 반대 운동은 옥룡면민들이 앞장서서 적극적으로 전개하고 있지만 백운산이 옥룡만의 백운산인가?

백운산은 광양의 백운산이며 백운산의 줄기는 광양의 마을마다 뻗어있고 백운산의 빛난 정기는 마을마다 어리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상기하여 거시적인 반대운동을 전개해야 할 것이다.

백운산은 광양인의 꿈이요, 희망이요 미래다. 광양인의 긍지이며 자존심이다.
광양인의 꿈을 짓밟는 백운산 송전탑 건설계획은 즉각 철회되어야 할 것이다.

 

입력 : 2005년 11월 0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