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룡면 죽천리 항월마을에 ‘오천서원’ 복원
옥룡면 죽천리 항월마을에 ‘오천서원’ 복원
  • 이수영
  • 승인 2006.10.20 15:01
  • 호수 18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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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진위 "3천평 부지매입 건축비 80억 소요" 밝혀 문화재 설원기 목판본 등 전시 예정
▲ 옥룡에 들어설 오천서원 조감도
고려 충신으로 학자이자 화가이며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거쳐 간의대부에 이른 차원부(1320~1398)선생 등의 유물이 전시될 ‘오천서원’이 옥룡면 죽천리 항월마을에 복원된다.

광주·전남 유림들로 구성된 오천서원이설복원추진위와 광양시, 연안차씨 종친회는 지난 7일 오전 11시 광양유림회관 회의실에서 ‘오천서원이설복원추진위원회’ 발기총회를 갖고  전남유형문화재 212호인 설원기 목판본 등이 전시될 오천서원을 옥룡면 죽천리 항월마을에 복원하기 위한 예산 확보에 나섰다고 12일 밝혔다.

내년 봄 기초공사를 위해 첫 삽을 뜨게 될 ‘오천서원’은 운암공 차원부 선생의 충절과 학덕을 기리고자 호남유림들이 1793년(정조 17년)주암면 천평리에 창건한 사원으로 이후 1868년(정조 5)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절 당했으나 1897년 후손들에 의해 여천군 율촌면 신풍리 구암마을로 옮겨 세워졌다.
▲ 차원부선생의 유품.... 문절공시호 교지(敎旨)(사진 상)과 망우리묘소에서 출토된 문절공의 유품. 문절고의 유품에는 청자로된 벼루와 호로, 수저등 8품이 있다. 하지만 오천서원은 지난 2000년 여수공항 활주로 확장 공사로 인해 또다시 이설이 요구되자 문절공 차원부 선생의 직계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 옥룡면 일대 죽천리로 이설해 복원한 후 그의 충절과 학덕을 기리키로 한 것.이에 오천서원복원추진위는 최근 옥룡면 죽천리 588(현 광양농원)3천여 평의 부지를 사들여 소유권 이전을 마친 상태로 조만간 2천여 평을 더 매입해 총 5천여 평에 80억 규모의 오천서원을 복원할 계획이다.이에 대해 차호철 문중대표는 “고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해 당대의 명유 정몽주(鄭夢周)·이색(李穡) 등과 성리학을 깊이 연구한 차원부 선생의 충절과 학덕을 기리고 추모할 오천서원은광양지역 관광산업 진흥에도 기여할 것”이라며 “오천서원이 옥룡면 죽천리로 옮겨 복원되는 만큼 오천서원을 죽천서원으로 명칭 변경을 논의하고 있다”고 말했다.그는 이어 “죽천서원(가칭)내에는 차원부 선생의 유품과 문화재인 설원기 목판이 숭모제에 전시되고 사육신을 모실 충인당과 강당 등이 건립돼 향후 죽천서원은 학생들의 산 교육의 장으로 활용될 것”이라고 귀띔했다.한편 광양시는 오늘(13일)중으로 접수될 오천서원복원추진위의 오천서원 이설복원 계획을 접수 받아 오천서원 이설 복원에 따른 문화재 보수 예산을 전남도와 문화재청 등에 제반 예산을 신청할 계획이다. 문절공 차원부 선생은 누구인가. ▲ 차원부 선생

차원부(車原부 1320~1398)선생은 고려말에 정국이 혼란하고 국운이 기울 때, 정도전·길야은 등의 충신들과 시국을 논하며 충정을 주체할 수 없어 눈물을 흘렸던 충신으로, 후일 두문동 72인으로 조선개국에 세상을 등지신 중의 한분이다.

공은 용모가 훤칠하고 천성이 온후하며, 경서와 사학에 통달하여 공민왕 3년(1364)에 문과급제하고 간의대부의 벼슬에 올랐다. 공은 문인화가(文人畵家)로서 사군자에 조예가 깊고, 특히 매화그림은 세인의 추종을 불허하여 선배인 정지상(鄭知常)과 더블어 고려 오백년에 쌍벽으로 불렸다.

공은 고려의 충신으로 왕에게 바른 말을 잘하는 10명의 신하중 일인자였으나, 공은 고려가 망해감에 따라 도저히 망국(亡國)을 막을 수 없음을 깨닫고, 관직을 내놓고 평산(平山) 수운암동(水雲巖洞)에 운둔하였다.
고려의 망국의 가까울 때에 이성계(태조)장군과 이방원 부자가 함께 공을 찾아 가르침을 청하였다. 평소 이 장군은 운암공을 존경하였기 때문이다.

이성계의 왕위 등극으로 조선이 세워진 후, 신하인 조준과 이양우를 특사로 하여 운암공에게 이조 개국공신으로 책록하겠다고 전하니, 운암공은 "우리집안 대대로 고려왕조의 벼슬을 받은 지 이미 오백년 이며, 공양왕(고려 34대 마지막 왕)이 살아 계신데, 어찌 두마음으로 우리 선조의 충렬(忠烈)을 더럽힐 수 있겠는가?" 하며 거절하였으며, "차라리 다섯말의 식초를 마실지언정 이조(李朝)의 훈작은 받지 않겠다"고 단호히 거절하였다.

이 태조는 군신지간이 아닌, 옛 친구로써 모셔오도록 관포와 말과 예물을 보냈으나, 또 거절당하였다. 그래도 이 태조는 하루에 다섯번의 왕명을 내리고 한 달에 세 번의 특사를 보내어 간청하였다. 한데 번번이 거절하기를 수 개월 간이 되었다 한다. 그러나, 결국 공은 이 태조의 우정에 감격하여 말 대신에 당나귀를 타고 한양에 답례차 들어갔다.

이 태조는 매우 환대하여 몇 달 동안 담소를 즐기면서 별궁(別宮)에 머물게 하였다.

이로써 운암공은 이태조와 이방원 부자를 도와준 일이 있었으나, 후일 죽임을 당하는 이율배반적 일이 발생하니, 이조 개국 공신인 정도전·하륜 등 4명은 차씨의 서외손(庶外孫)이어서 운암공이 수운암동에서 차,유씨 대동보(車, 柳氏 大同譜)를 만들어 해주 신광사에 보관시킬 시, 그 대동보에 들어 있는 위 사인은 자신의 이름위에 서(庶)자를 넣은 것에 앙심을 품었고, 그 중 하륜(河侖)이 앞장을 서서 "운암공은 역적 정몽주의 외종형이며, 이조의 건국에 참여 하지 않고, 당시 세자인 방석의 비와 증조부 벌이 될 뿐 아니라 지금 역적 정몽주의 잔당과 음모를 꾸미니 제거해야 한다." 고 모략을 이방원에게 하였던 바, 이방원은 그렇게 하라고 승낙하였다.

이에 하륜은 이방원의 막하 장군 이숙번에게 이방원의 가병(家兵)을 인솔하여 태조와 작별하고 송도(개성)의 옛집으로 돌아가는 운암공을 송원(松原)과 마원(麻原) 사이에서 무참히 살해하니 1398년(태조7년) 9월 15일로 79세의 나이였다.

이 때에 운암공을 마중나갔던 문중 71인이 함께 주었으며, 이를 후일 이방원이 잘못됨을 알아, 공이 살해된지 5일 만에 공의 영정에 좌찬성(左贊成)의 벼슬을 증직하였다. 그러나 공의 아들 차안경(車安卿)은 좌찬성의 증직을 가지고 온 칙사의 교지를 받지 않고 목매어 자살하고, 그의 부인 평산 신씨 또한 거절하니 공의 영전에서 왕명 불복죄로 참살되었다.

운암공은 조선 단종 때 임금의 명으로 박팽년과 하위지가 차원부 설원기(雪寃記)를 지어 세상의 귀감이 되도록 반포하고자 하였으나 세조 2년 (1456)에 사육신으로, 단종의 복위에 실패하고 주임을 당하여 역적의 글이라 하여 빛을 보지 못하였으나, 숙종 17년(1691) 단종을 복위함에 사육신도 복위되어, 운암공의 충절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차원부의 시호는, 세조 2년(1456) 5월 차원부 설원기를 본세조가 문절공(文節公)이라 내렸으며, 증직은 승정대부 의정부 좌찬성이며 문하시중으로서 고려 때 간의 대부(諫議大夫)였다.
 
입력 : 2005년 10월 1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