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의 큰 선비들 우국충정 노래한 유서 깊은 곳
지역의 큰 선비들 우국충정 노래한 유서 깊은 곳
  • 귀여운짱구
  • 승인 2008.11.27 08:54
  • 호수 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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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호정’…매천 황현과 황명중·김응란 등의 사랑방 역할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봄이 열린다는 섬진강. 북쪽으로 산마을, 남쪽으로는 강마을 정취가 그윽한 다압면의 봄은 매화향이 휘날려 천리 길을 달리는 곳으로 유명하다.
계절마다 은어떼 연어떼를 바꿔 몰고 햇살 눈부시며 휘어 돌아가는 강줄기 양 겨드랑이에는 매화꽃이 달리는 듯 싶으면, 금방 벚꽃이며 야생 차밭 다향이 그림자처럼 따라붙어 관광객의 가슴을 환장하게 뒤집어놓는다.

늦가을 우리마을 순례를 위해 다시 찾은 다압은 망덕포구에서 섬진강변을 따라 한참을 달리고서야 백운산 깊은 자락에 호젖하게 자리한 염창마을을 만난다.
광양정신 살찌우는데 큰 역할
염창마을 버스 정류장에서 언덕길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서야 동네가 시야에 들어 온다. 백운산 깊은 자락에 옹기종기 자리하고 있는 마을이기에 섬진강변에서는 마을이 보이질 않는다. 마을에 다다르니 이런 곳에 마을이 있었는가 싶다. 산세가 예사롭지 않다. 마을회관에서 산등성이를 쳐다보니 섬진강을 응수하듯 자리하고 있는 ‘감호정(監湖亭)’이 시야에 확 들어 온다.

이 정자의 이름에서 묻어나듯 우리지역의 선비들은 이 곳에서 섬진강의 푸르른 강줄기를 내려다 보며 난세를 한탄, 우국충정을 노래했을 것이라 짐작한다. 이 ‘감호정’은 조선시대 우리지역의 선비 김지섭(1798~1862)이 세웠다.
김지섭은 비록 벼슬길에는 오르지 못했지만 이곳에서 여생을 보내며 지역의 큰 선비들과 교류, 지금의 광양정신을 살찌우게 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그후 이 정자는 김지섭의 아들 응란(1850~1924)에게 대물림돼 이때부터 같은 또래였던 지역의 선비 매천 황현과 황명중, 그리고 김응란 등과 교분을 쌓는 등 광양과 하동 구례 등 선비들의 사랑방 역할을 톡톡히 했다.

 
특히 이 감호정은 우리지역의 정신적 지주로 자리매김 했던 수 많은 선비들의 들고난 흔적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1900년(고종 30)에 매천 황현이 쓴 중건기가 이곳을 잘 웅변하고 있고 한말의 선비 주하섭의 시 두 수가 함께 하고 있다.
‘감호정’을 이야기 할 때 매천 황현을 빼놓을 수 없다.

당시 이 정자의 주인 김응란과 두터운 교분을 나누었던 매천 황현은 당시의 부패한 과거제와 조정의 현실을 간파한 그는 벼슬을 버리고 1888년을 전후해 귀향한다. 두 번째 낙향한 이후에도 서울의 문우들이 함께 일하자고 권했으나 “그대는 어찌하여 나에게 도깨비 같은 나라의 미치광이 장난을 하려는가”하고 단호히 거절하고 아예 고향에 눌러 앉았다.
매천은 구례와 이곳 감호정을 오가며 지역의 선비들과 어울려 어지러운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며 꼼꼼히 일기를 적어 나갔다.

그것이 훗날 ‘매천야록’이다. 이 책은 1865년부터 1910년 8월까지 45년 동안에 일어난 주요한 사건을 주관적으로 정리해 편년체로 구성된 것인데, 한말 우리지역 큰 선비 매천의 올곧은 정신이 아로새겨져 있다. 이는 민중의 여론 등을 함께 싣고 있어 근대역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 받고 있다.
감호정을 촬영하고 돌아나오는 발걸음이 영 무겁다. -새와 짐승도 갯가에서 슬피운다/무궁화 이 나라는 영영 사라졌는가/가을 등불아래 책 덮고 옛일을 생각하니/지식인 노릇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매천의 절명시 끝 구절이 내내 머리 속에 맴돌기 때문이다.
 
 
전국 유일 ‘족보바위’
 
감호정을 돌아나와 산비탈을 따라 오른쪽으로 발길을 옮기다가 양재봉 이장을 만났다. 양재봉 이장은 지난해 본지 지면평가위원으로 활동했던 분이라 ‘우리마을 순례’차 마을을 방문한 기자를 반갑게 맞이 했다.
산비탈에 웅장한 모습으로 섬진강을 바라보며 위용을 뽐 내고 있는 이 족보바위<사진 참조>는 알고 보면 해방후 좌우익간에 갈등을 빚은 지역의 아픈 현대사를 간직한 곳이다. 이 족보바위는 일명 ‘설통바구’라 불리고 있는데 사람 손이 닿지 않는 바위 벽면 윗쪽에 사각형 홈이 파여 족보가 숨겨져 있던 곳이다.

이는 다름 아닌 김해김씨 족보가 그곳에 숨겨져 있었는데 이는 감호정 김응란의 후손들이다. 김응란의 후손 김을수(1914~)는 1950년을 전후해 공산치하에서 광양군당 인민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다.
특히 이 마을은 여순사건때 최대 피해를 입은 현대사의 아픈 현장이기도 하다. 반란군이 국군에 쫓겨 백운산에 잠입한 이후 주민들은 엄청난 인명피해를 입었다.
당시 살아 남은 사람은 뿔뿔이 흩어져 한때 마을 주민은 겨우 2~3가구만 살고 있었다고 하니 당시 상황을 가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족보바위를 접하면서 당시 어쩔 수 없는 아픈 시대상을 이해하면서도 사건 자체가 지역의 현대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결코 적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도 이 역사적 사건에 대한 충분한 평가작업이 이루어 지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우리마을은…
 
염창마을은 역사가 오래된 마을이다. 고려시대(918~1392)부터 이 지역에 소금을 보관하던 창고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래서 염창마을이다.
조선시대(1452)에는 제염장에서 일하는 사람이 34명으로 이곳에서 소금을 공납한 물량이 214석이라고 세종실록지리지에 나와 있으니 큰 규모의 마을이었다. 마을 앞 섬진강변 선착장에는 진월면 오사리와 골약 등지에서 생산된 소금이 속속 도착해 강 건너 화개장터와 경계에 있는 구례, 그리고 경남 산청과 전북 남원 등지로 실려나갔다.

32가구에 63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는 염창마을에는 옛 특정 지명도 많다. 귀신터, 손문당, 계박골, 산지당, 시루봉, 제기뜰, 쥐박골, 호랑이산, 배섯거리 산지당, 웃터 등등.
과거 마을에서 생산되는 주산물과 특작물은 ‘벼와 밤’이었으나 지금은 매실과 감, 작설차 등이 있다.
마을의 백미는 족보바위 앞에서 내려다 보는 섬진강 풍광이다. 어머니처럼 품을 넉넉하게 연 섬진강과 족보바위 앞에서 수 백년을 묵묵히 인고의 세월을 견디어 온 서어나무는 마을의 당산나무다.

마을 출신으로는 △정현구(1955년생)삼보테크 대표 △정현태(1954년생 청와대 근무) △정광석(1958년생 곡성 오산우체국장) △김동철(1951년생 광양시청 계장)△정용순(1967년생 부산 해운대경찰서 경사)△양해석(1971년생 육군 소령)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