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들, 친환경 곶감으로 마을 부농 일궈
주민들, 친환경 곶감으로 마을 부농 일궈
  • 이수영 기자
  • 승인 2008.12.11 11:08
  • 호수 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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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불봉 향하는 등산로 원시림 그 자체 ‘산행 각광’

진상면사무소에서 어치계곡을 향해 약 8km쯤 다다르게 되면 진상면 황죽리 구황마을을 만난다. 마을에는 성두천이 흐르고 있고 우뚝 솟은 백운산 억불봉이 마을을 감싸고 있다. 구황마을’은 원래 ‘황리’라 불리었으나 ‘신황마을’이 생기면서 ‘구황마을’이라 칭하고 있으며 현재는 48가구에 172명이 살아가고 있다.

명품 곶감 친환경으로 승부 ‘주효’

“마을 큰애기 곶감깎으러 다 나간다”는 옛 민요가 있다. 진상면 구황마을이 그런 것 같다. 9일 찾은 이 마을 곶감 건조장에는 주렁주렁 매달린 선홍색 생감들이 먹음직스러운 곶감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집집마다 곶감으로 독특한 정취가 넘쳐난다. 이 마을은 주소득원이 밤과 매실이었다. 그러나 6년전 ‘백학동억불곶감’ 작목반이 조직되면서 곶감마을로 변신했다. 24명이 참여하고 있는 ‘백학동억불곶감’ 작목반(반장 김재철·50)은 지난해 전남대학교 산학협력단으로부터 떫은 감과 곶감이 친환경인증을 획득했다. 작목반원 24명 중 무려 20농가가 친환경을 획득해 주위를 놀라게 했다.


친환경농가는 서기홍(75)회장이 모임을 이끌고 있다. 친환경인증작목반은 지난해 곶감으로는 두 번째 친환경을 획득, 첫 해에 2kg포장 한 박스에 상품은 3만5천원~4만원에 판매돼 5억원의 소득을 올렸다. 이런 구황마을의 수억대 매출은 그냥 운이 좋아 이뤄진 것이 아니다.
구황마을 주민들은 생산 기술을 배우기 위해 곶감으로 유명한 경북 상주와 충북 영동 경남 산청의 농가를 수시로 찾아 다녔다.


하지만 곶감 노하우를 쉽게 얻을 수는 없었다. 유기홍 회장은 “지금에야 별것 아닌 그 기술들이 그땐 왜 그리 신기하고 어려웠는지 모릅니다”며 웃었다. 그 어르신은 웃는 눈빛이었지만 그동안 주민들과 함께 겪은 고초가 작지 않았음을 짐작케 했다.
김재철 전 이장은 “무엇보다 농업기술센터의 지원이 큰 힘이 됐다”며 “현재 우리마을 곶감은 당도가 60브릭스에 육박해 광양제철 등 지역 기업체와 관공서, 출향 향우들에게 인기리에직거래돼 매년 전량 팔려나간다”고 말했다.


김용호(45) 이장은 “우리마을이 곶감으로 유명하게 된 것은 마을 선배님들의 노고에 다름아니다”며 “생산 전에 기업체 등을 찾아 시식회를 가지는 것도 억불곶감이 매진 되는 이유 중의 하나”라고 귀띔했다.
구황마을에서 생산되는 곶감은 건조과정에 수분과 시기 등 여러 가지 요인이 작용해 명품으로 일궈냈다. 구황마을 곶감은 차례상이나 제수용품으로 팔려나가는 시대를 이미 넘어선 것이다.

지금도 없어서 못팔릴 정도지만 주민들은 내친김에 서울 등지의 유명 백화점에 납품해 구황마을의 품질을 인정받아 보겠다는 야심찬 각오를 다지고 있다. 곶감은 겨울철 최고기호식품이자 성인병 예방에 좋은 건강식품으로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기호 식품으로 그 인기가 절정으로 치닫고 있는 이마을 곶감에서 백운산의 또다른 무한한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우리마을은…

1480년께 남평문씨에 의해 마을이 형성됐다고 전한다. 특히 구황마을은 백운산 억불봉 아래 자리하고 있어 여름 피서지로 안성 맞춤이다. 마을에서 억불봉으로 향하는 오솔길은 원시림 그 자체다. 억불봉을 향해 오르는 산행은 원시림으로 둘러 쌓여 있어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울창한 숲으로 우거져 있다. 그러기에 왼쪽으로 흐르는 계곡은 억불봉 아래까지 약 3km가량 이어져 있어 사시사철 계곡에 흐르는 물 소리를 들으며 산행을 만끽할 수 있다.


계곡 등산로를 따라 2km 쯤 다다르면 문화유적인 생쇠골 야철지를 만난다. 이곳은 쇠를 다루던 고로 1기가 남아 있으며 작업장과 생활공간 등의 흔적이 남아 있다. 하부직경 1m, 높이 약 90cm의 노터가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 있다. 생쇠골 야철지는 석회석과 규석, 철광석, 슬래그가 남아 있으며 동학난과 항일운동때 쇠를 달구어 무기를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또한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학자인 길암 이현일 1627(인조 5)~1704(숙종 30)의 종친들이뿌리 내린 곳이기도 하다.


길암은 형인 휘일과 함께 영남학파의 주요한 인물로 이황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지지하여, 이이(李珥)학파의 설을 비판했다. 길암은 재령이씨로 종중들이 경남 함안에서 하동 옥종면 운곡리로 이사 후 효종 7(1656)년 이후 이곳 진상면 구황마을에 정착했다. 지금도 어치와 황죽 등에 종친이 살고 있다. 길암 이현일은 71세때인 1697년 5월, 옥룡면 옥동마을에서 유배 생활을 하기도 했다.


구황마을은 백운산 자락 억불봉 자락에 위치해 있어서 그런지 옛 지명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안장바구 능선 아래 가마같이 생겼다 하여 가매바구를 비롯, 국시봉 아래의 간터, 고작골, 옛 성두마을 골짜기인 고작골과 골밭골, 말처럼 생겼다는 말바구, 새우혈인 새우골, 안장바구, 돌이 많이 있어 유래된 독밭거리, 마당재, 여우가 살았다는 여숫골, 공비들이 주둔했다는 큰 굴밖골, 칼바구, 어딤이골, 장국시봉, 불무청 등등이 그것이다.

마을 출신으로는 이태운(62)대전고등법원 법원장이 있으며 그의 부인은 전효숙 전 헌법재판소 재판관이다. 또한 △이태상(69)진상초등학교 교장 역임 △이병욱(45)서울시청 근무 △이병한(45)국세청 근무 △이현철(58)동대문구청 과장 △이병남(43)진상면사무소 민원계장 △이병철(41)경기 양서고 교사 △이병국(41)남도대학 근무 등이 구황마을 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