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첫날 삼형제 ‘아주 특별한 백운산행’

2010-01-07     광양뉴스

형제들의 백운산 신년 산행은 일주일 전부터 계획된 일입니다. 한 달 전 당초 고흥 팔영산 등반 계획을 세웠다가 둘째가 성불사 백운산 등반코스가 백운산의 주능선을 탈 수 있다는 제안에 따라 산행 일주일전 급박하게 변경을 하게 된 것이지요. 형제들의 백운산 산행은 잦은 편이지만 성불사 코스는 아직 경험하지 못했다는 것도 결정의 배경이 됐습니다.
경인년 1월 1일, 아침 일찍 밥을 챙겨먹고 산행을 준비하는데 셋째가 아직 잠을 털고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지역신문에서 일하는 셋째가 기축년 마지막 날마저 회사 회식을 핑계로 늦게까지 과음을 한 탓입니다. 가족들의 채근이 있고서야 겨우 일어난 셋째와 함께 고향집을 나선 시간이 오전 10시쯤이었지요.
바람이 많은 날입니다. 성불사로 오르는 초입 길에 차를 세우고 내리자 겨울 찬바람이 단단히 여민 옷깃을 뚫고 매섭게 온몸을 할큅니다. 늦잠을 잔 탓에 준비가 소홀했던 셋째가 모자를 미처 챙기지 못했다며 툴툴댑니다. 앞서 준비하지 않으면 그런 낭패를 보게 되는 법이지요.
도로 곳곳이 얼어붙어 걷기조차 쉽지 않습니다. 30분 쯤 올라가자 성불사가 보이더군요. 풍경소리가 막 기지개를 펴기 시작한 경인년 새해를 낭낭하게 깨우고 있었습니다.
생각보다 사람이 많지 않았지요. 아무래도 사람들에게 알려진 광양제철소 수련관이나 옥룡면 진틀마을, 제일송어장 코스보다 덜 알려진 탓이겠지요. 신년 산행을 준비하는 사람이 꽤 많을 것으로 예상했는데 말이지요. 하지만 삼형제가 아무도 밟지 않는 눈길을 뚫고 오르는 단촐한 산행은 그래서 행복하겠거니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 사람이 자주 다니지 않는 산길은 등산로를 구분하기 어려워서 처음부터 난관에 부딪혔지요. 그래서 옛 시에 ‘눈 내린 길을 걸을 때 함부로 걷지 마라. 오늘 내가 남긴 발자국이 훗날 다른 사람에게 이정표가 되리니’라고 했나 봅니다. 이 시는 평소 존경하는 백범 김구 선생이 애송했던 시이기도 합니다. 눈 내린 눈길에 함부로, 생각이 없이 이 길 저 길, 여기 저기, 서성거리듯 발자국을 남기면 뒤에 오는 사람이 무엇을 보고 바른 길을 찾아 갈 것인가라는 하는 채근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띄엄띄엄 나뭇가지에 붙은 산악회의 띠를 따라 바람에 흔들거리는 산죽(山竹)길을 따라 걷기 20여 분쯤 되었을까. 이번에는 바위길이 눈에 덮여 발목을 다치기 쉬운 길이 나옵니다. 그 울퉁불퉁한 바위 길을 지나면서 형제는 서로에게 조심하라는 당부를 하고 다시 길을 재촉합니다. 그렇게 산 속에 들어서자 살을 에일 듯 불어 닥치던 바람이 갑자기 잠잠해 집니다. 바람도 산에 순응할 줄 아는 법이겠지요.
그러나 그때부터 난코스가 시작됩니다. 산책길처럼 완만하던 경사가 갑자기 가팔라지기 시작합니다. 간 밤 내린 눈이 녹지 않아 발목을 덮었고 수북이 쌓인 낙엽은 쉽게 미끌리면서 자칫 발목을 다치기 십상이었지요. 누구보다 숙취가 덜 깬 상태에서 산행 길에 나선 셋째가 힘들어 하는 모습입니다. 셋째의 얼굴과는 달리 능선 위를 차지한 겨울 하늘은 시리도록 맑습니다. 소망하기 참 좋은 날이라는 생각이 문득 듭니다.
그렇게 한 시간여 쯤 오르니 사방이 환히 밝아집니다. 드디어 첫 목표지점에 도착했거니 생각했지요. 그러나 낭패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정상은 한재라는 길목이었습니다. 당초 형제봉을 거쳐 도솔봉 코스를 선택했는데 산행코스가 중간에 잘못된 것입니다. 형제들이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허탈한 웃음을 지을 밖에요.
최종목적지인 도솔봉까지 마저 걷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능선을 타는 길이라 수월할거라는 기대는 여지없이 어긋나고 맙니다. 한파가 계속되면서 며칠 전 내렸던 폭설이 무릎 위까지 차올랐기 때문입니다. 평소 산행을 자주 하는 둘째는 문제없이 눈길을 뚫고 휘휘 앞장섰지만 셋째는 이제 발이 경련을 일으키면서 발길 한 걸음 내딛는 일도 쉽지 않은 모양입니다.
앞서 걸으면서 자주 뒤따라오는 셋째를 쳐다봅니다. 쉬엄쉬엄하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눈길을 헤치며 따라옵니다. 어려서부터 힘겹다는 말을 함부로 내뱉지 않았지만 제 속에 상처가 많은 아우입니다. 아우를 생각하면 잔잔하던 마음에 물기가 자주 어립니다.
이런저런 상념에 젖는데 둘째가 부르는 소리가 들립니다. 벌써 정상에 도착한 모양입니다. 발목에 힘을 줍니다. 셋째의 발걸음도 힘을 냅니다. 사이사이 보이는 눈꽃이 참 곱다는 생각을 그때 합니다. 작고 작은 것들이 모여 눈꽃을 피우는 모습이 한 몸에서 태어난 형제와 다름 아니라는 생각을 그때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도솔봉 정상입니다. 정상에 서자 상봉과 억불봉에 이르기까지 백운산이 거대한 위용을 드러냅니다. 사실 몇 번씩이나 백운산에 올랐지만 오늘에서야 백운산의 진면목을 본 것 같습니다. 하기야 산은 그렇게 매번 다른 모습으로 산을 찾는 사람에게 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지요.
도솔봉 정상에 올라 생각해 봅니다. 뒤돌아보면 지난해는 저희 가족이나 형제들에게 많은 일들이 있었지요. 어머님의 건강이 좋지 않아 수술을 받아야 했기 때문에 걱정으로 시작된 해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평소 허리가 좋지 않던 어머님은 무리한 노동 탓에 수술을 받고 농사일도 포기할 정도였습니다. 더 이상 무리한 일은 금물이라는 의사의 말이 뒤따랐습니다. 당연히 올해 가족의 첫 번째 소망도 어머님의 건강이지요.
다른 한편으론 고마운 일도 많았던 한 해였습니다. 2008년 말경 돌연 사직서를 내고 힘겨워 하던 둘째가 새 직장을 갖고 새롭게 출발했고 웃음이 없던 얼굴이 유독 환하게 피었던 한 해였지요. 곧 차장 승진을 한다는 반가운 소식입니다. 글을 쓰는 셋째도 2년여 간 고된 야인생활을 끝내고 지난해 1월 작은 지역신문에서 다시 일을 시작했습니다. 더구나 혼자였던 셋째에게는 좋은 인연이 올 것 같은 새해이기도 합니다.
몇 가지 소원을 빌고 나서 가져온 매실주를 꺼내 놓습니다. 삼형제가 모여 앉자 매섭게 몰아치던 바람도 잠시 잠잠합니다. 매실주 한잔씩 들고 “건강하고 행복하자”는 덕담을 주고받습니다. 매실주  한 잔이 들어가자 속이 모락모락 따스하게 덥힙니다. 이제 막 시작되는 경인년 새해에도 이렇게 따스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삼형제 뿐 아니라 우리 이웃에게도 그러하길 빕니다.
/백운산 도솔봉에서 독자 최동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