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호도의 지명사료<1>

조 동 래 시인·수필가

2015-03-13     광양뉴스
역사는 변하며 발전하는 것이기 때문에 조직의 구성은 물론 지명의 명칭도 많은 변화를 거듭해 왔다.

오늘날 상전벽해로 변한 금호동의 지명은 시민들 사이에 와전된 내용이 회자되고 있음은 심히 유감스런 일이다. 이를 바로잡아야 하는데 관심을 갖거나 연구하는 사람이 없으니 더욱 허전하다.

금호도는 광양제철소가 건립되기 전에는 금호리로 4개 부락(도촌, 내동, 대동, 양도마을)이었으며 가구 수는 266호였고, 인구는 1887명이 단란하게 살았던 고장이다. 그러나 제철소가 건설된 후 새로운 생활공간이 마련돼 현재 5082세대, 1만4480명이 거주하는 새로운 주거단지로 발전했다.

옛 금호도는 지형지물의 형체는 사라지고, 원래 살았던 주민은 전체가 타향이나 인근지역으로 이주해 갔다. 광양군에는 조선조 말 34개의 섬(유인도 13개, 무인도 21개)을 품고 있었다. 그런데 광양제철소 부지조성을 위해 11개 섬을 폭파해 그 돌로 축대를 축조하여 454만 평의 부지를 조성했던 것이다.

때문에 금호도에 속해 있던 작은 섬과 암초는 모두 사라지고, 4개 마을도 형체를 찾아 볼 수 없게 평탄작업을 했으니 상전벽해가 이루어진 셈이다. 그 실상의 이해를 돕기 위해 부지조성사업이 시작되기 직전에 사진작가 신윤식이 남긴 금호도의 전경을 참고해 주기 바란다.

금호도의 명칭변경의 역사를 짚어보면 광양시지를 비롯해 여러 자료를 근거로 할 수 있으며, 세종실록지리지 전라도 광양현조 와 신 동국여지승람 제 40권에 금호도 지명이 처음으로 국가기록문에 등재돼 있으며 명칭은 우도(牛島, 소섬)라 표기돼 있다.

그리고 호구총수 제6책 전라도 편에 금호동 지역은 옥곡면에 속하며「牛島村」이라 돼 있다. 그러던 것이 철종 12년 명례궁 수세절목과 대동여지도에 금호도 지역을 牛島 또는 金湖라고 했다.

그리고 1872년 광양현지도에 금호도 지역을 문헌상 최초로 金島라고만 표기 했다. 광양현 지도는 광양군지, 광양시지 또는 그 외에 가장 많이 활용되고 있으며 흔히 볼 수 있고, 칼라로 제작돼 있다. 이 지도에 건대산 지금의 봉화산에 봉화 촛불 표시가 선명하게 그려져 있다.

금호도에 있던 양도(羊島)마을은 염소 섬인데 그 연유는 임진왜란 때 이곳에 염소를 방목해 군납하였다고 한데서 유래됐었으며 이름을 한문표기로 양도라 하였다.

이 기록은 문헌사료인 호남읍지(湖南邑誌, 1871년)에 우도(牛島)에 염소를 방목하기 위하여 목장을 설치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만약 쇠(鐵)의 뜻을 가진 지역이었다면 쇠에 대한 지명이나 전설이 있어야 하는데 어디에도 그와 관련된 기록은 없고, 소(牛)에 대한 지명은 여럿이 있으니 우도(牛島)이었던 것이 확실해 보인다.  

옛 금호도에 거주했고 지금은 인근에 이주해 살고 있는 원로인(元老人) 백양술ㆍ백관찬ㆍ백현술ㆍ강한호 등의 증언에 의하면 도촌마을 비운도는 꼿뱅이(소고삐)섬이라고도 하는데, 와우마을(臥牛 눈쇠)의 소고삐에 해당된다고 전해왔다는 것이다. 

또한 내동마을에서 비운도 까지도 그러한 내용이며, 대동마을 구덕개는 대동마을 앞에 있던 큰 개(浦)이고, 양도와 샌등을 있는 둑으로 개를 막아 개땅쇠 논이 되었다. 이 지역을 구덕개 - 들이라고 하였는데 소의 구시(구유)에 해당된다하여 불러지고 있던 지명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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