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노래는‘희망•꿈•벗’영원한 동반자

2018-08-10     김영신 기자

교통사고로 시력 잃은 장애인 김현순 씨‘정식 가수 등록’

예명‘금잔화’…“노래할 수 있는 곳은 어디든 달려가고파”

시련 이기고 안마사자격증 취득‘두 아들 훌륭히 키워내’

 

 

30년 전, 불의의 교통사고로 1급 시각장애인이 된 김현순 씨(58)는 최근‘금잔화’라는 예명으로 한국가수협회에 정식 등록한‘가수’가 됐다.

어릴 적 부모와 떨어져 외할머니댁에서 자란 현순씨는‘현순아, 사탕 줄께 노래 한 곡 불러봐라’하면 이미자, 조미미, 하춘화의 노래를 여섯 살 나이에 맞지 않게 곧잘 불렀다.

외할머니댁에서 김 씨는 외삼촌의 아이들을 안고 십리 길을 걸어 밭에서 일하는 숙모에게 데리가 젖을 먹이러 다니는 등 고생을 했지만 독한 외숙모는 김 씨를 초등학교 2학년 마칠 무렵부터 학교에 보내주지 않았다.

친정엄마는‘고생하며 사느니 차라리 시집가서 니 살림하고 살아라’며 열여덟 살 된 현순씨를 알코올 의존증이 있는 나이 많은 남자에게 속아서 시집을 보냈다.

결혼 후 2년 동안 아이가 없어 아이를 못 낳는다고 구박까지 당하며 살다, 아들 둘을 낳고 살았지만 행운의 여신은 현순씨를 외면했다.

1988년 큰 교통사고를 당해 15일 만에 깨어났으나 시신경이 손상 돼 앞을 볼 수가 없게 된 것.

앞을 못 보게 되자 남편은 이혼을 요구했고, 아이 양육문제로 법정까지 가게 됐지만 당시 일곱살, 다섯살이던 아들이 “엄마 눈이 안보이니까 엄마랑 살겠다”고 해서 아이들을 데리고 집을 나왔다.

돈 한푼 없이 집을 나온 현순씨는 돌아 누을 틈도 없는 5만원짜리 비좁은 사글세를 얻어 살았다. 하루하루 사는 게 고통스러워서 죽으려고 마음을 먹었다.

어느 날 아이들을 학교에 보낸 뒤 벽에 못을 박고 미리 준비한 노끈을 매달았다. 번개탄을 피워놓고 방문을 닫은 다음 죽을 준비를 끝냈다. 그러나 마침 골목을 지나던 한 수녀가 번개탄 냄새를 맡고 문을 두드렸고 현순씨는 살아났다.

현순씨는“수녀님이 문을 계속 두드렸는데 문을 열어주지 않자 직접 창호지를 뚫고 문고리를 따고 문을 열었어요. 수녀님 손에 이끌려 마당으로 나왔어요”라며“수녀님이 그러시더라구요. 골목을 지나는데 왜 그런지 이상하게도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하나님이 인도하신 것 같다’며…그래서 처음 자살시도에 실패 했어요” 라고 말했다.

다시 하루하루를 힘들게 살아가던 현순씨는 오직 죽을 생각 밖에 하지 않았다.‘앞 못 보는 엄마 밑에서 힘들게 사느니 차라리 내가 죽고 없으면 좋은 양부모 만나서 살게 되지 않을까? 누구와 살아도 엄마랑 사는 것보단 낫겠지…’하는 마음에서였다.

외출할 일이 있을 때마다 수면제를 두 알씩 사서 모았고 먹으면 바로 죽을 수 있는 양만큼 수면제가 모아졌다.

약을 먹으려고 결심한 날, 친정엄마가 갑자기 찾아왔다. 두번 째 자살시도도 실패했다.‘아, 죽으라는 팔자가 아닌가 보다. 죽을 각오로 살아야겠다’고 마음을 바꿨다.

그리고 라디오를 듣기 시작했다. 카세트테이프 겸용 라디오를 켜고 장애인을 위한 사랑의 방송을 매일 들으면서 아이들과 다시 살아보기로 결심했다.

서울에서 건물 두 채를 가진 시각장애인 부부안마사의 이야기를 들었고 안마사가 되기로 했다. 그러나 막상 안마사가 되려고 보니 해부학, 경혈 공부를 해야 하는데 초등학교 졸업장도 없는 현순씨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중학교 검정고시부터 준비해야했다.

평택에 살았던 현순씨는 시각장애인을 가르치는 검정고시 공부방이 있는 서울 상계동으로 매일 공부를 하러 다녔고 6개월 만에 합격했다.

중학교 검정고시를 합격하자 고등학교 검정고시에 도전해 또 합격하고 본격적으로 안마사 자격증 공부를 시작, 3년 만에 자격증을 땄다.

안마사 자격증으로 안마소를 다니며 생계를 해결해가며 두 아들을 키웠다.

열심히 살던 현순씨에게 항상 미련이 남는 것은‘노래’였다.

기분 나쁘거나 우울하거나 스트레스를 받을 때 노래를 부르면 다 잊는다는 현순씨는 안마사 협회, 장애인 행사에 가면 항상 무대에서 노래를 불렀다.

2009년에 전국노래자랑에 나가 최우수상을 받고 연말결선까지 나간 적도 있었다.

서울 영등포가 고향인 현순씨는 평택에서 오래 살았고 최근에는 광주에 살았으나 실력 있는 안마사로 소문난 그녀에게 광양에 일자리가 있다는 지인의 소개로 3월에 광양으로 내려왔지만 매일 일이 없어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럴 때마다 현순씨는 노래를 부르며 힘든 마음을 달랬다.

그런 현순씨의 훌륭한 노래 실력이 광양에서 드러난 것도 시각장애인 이동차량을 운전하는 박현석 씨의 눈에 띄어서다.

안마손님이 단 한 사람도 없어서 몹시 우울한 날, 현순씨가 이동하는 차량에서 정재은의 연락선을 부르자, 노래를 들은 박씨는 깜짝 놀랐고 가수로 만들어 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이틀 일하고 하루 쉬는 박씨는 쉬는 날 김 씨와 가수협회에 등록할 서류를 준비하고 서울까지 가서 한국가수협회 정식 등록을 했다. 두달 만이었다.

드디어 가수의 꿈을 이룬 김현순 씨.

현순씨의 예명은‘금잔화’다. 이름도 박현석 씨가 지어줬다.

가수가 된 현순씨는 노래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가고 싶어한다.

‘엄마가 앞도 못보고 혼자 사니까 절대로 친구들 때리지 말거라, 차라리 맞고 오너라’ 하며 자식들을 키웠고 자식들은 잘 자라 성인이 됐다.

큰 아들이 결혼해서 아들을 낳아 할머니가 됐지만 한참 재롱을 떠는 막 돌이 지난 손자의 얼굴을 볼 수 없어서 마음이 아프다.

“다시 앞을 볼 수 있다면 아들과 손주 얼굴을 맘껏 보고 싶다”고 한다.

현순씨는“가수의 꿈을 이뤄주기 위해 쉬는 날임에도 불구하고 서류를 준비하고 가수협회에 등록까지 해 준 박현석 씨에게 말할 수 없이 감사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