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식(歎息)과 희생(犧牲)
탄식(歎息)과 희생(犧牲)
  • 광양신문
  • 승인 2006.09.13 11:53
  • 호수 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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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종렬 목사 / 마하나임 커뮤니티 교회
느헤미야라는 인물이 있다. 자기 민족이 포로생활을 하고 있을 때에 함께 이방의 포로로 끌려가서 살고 있으면서도 늘 고국의 소식을 접하며 살았던 사람이다. 어느 날 자기 민족의 정체성의 보루였던 성전의 성문이 훼파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자기 겉옷과 속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밀고 수일동안 울며 하늘의 하나님께 기도하며 탄식(歎息)한다. 그리고 철저한 준비기간을 거친 후에 그는 나라를 위해서 모든 관직생활을 청산하고 피폐한 고국으로 귀향한다. 그곳에서 목숨을 건 희생(犧牲)을 통해 민족공동체의 회복과 개혁, 성전 복원 등의 일을 기어이 다 이룬다. 구약시대의 인물 가운데 가장 고귀하고 의협심이 강하고 인격적인 인물로 알려진 사람이다. 

성경이외에도 세계사와 우리역사에 이러한 분들이 많이 있었다. 시대와 민족의 아픔을 외면하지 아니하고 탄식할뿐더러 자기희생을 마다하지 아니하고 아픔의 한복판에 뛰어들어 회복시키고 온전케 하려 했던 사람들! 이 시대 이러한 사람들이 그리운 것은 왜일까? 지금 이 시대에도 이런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많이 있다. 그러나 과연 역사가들에게까지도 그렇게 평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가장 많이 보이는 사람들이 정계(政界)의 사람들이다. 최근 정계인물들이 나오는 매체를 볼라치면, 그들의 눈빛에서 민족의 아픔을 끌어안고 탄식하는 눈을 보기 힘들다. 이합집산에 눈이 멀고 권력에 눈먼 사람들, 타인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역사에 이름 석 자를 남기려는 몸부림으로 소신도 없이 자고 일어나면 언제고 철새처럼 소신과 명분을 바꿔가는 사람들, 본인들은 나라를 위하고 국민을 위한다고 하지만 하는 모양새들은 동네 꼬마들 마냥 싸우고 토라지고 낄낄거리다 권력의 떡이 크다 싶으면 이내 가식적인 화해로 그림을 그린다. 그런 사람들의 거짓 미소 속에 진실한 사람들은 바보 취급되어 가려지고 보이지 않는다. 

돈을 위해서는 불법, 탈세, 굴욕, 부정을 저지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며, 결국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이론이 진리인양, 돈 앞에서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사는 재계(財界)사람들이 보인다. 돈을 위해서는 수년 동안 함께 희생한 사람들도 무 자르듯 내치며 대(大)를 위해서 소(小)의 희생은 당연시하는 풍토, 정직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으므로 탈세는 필수라고 생각하는 경영인들, 남는 게 없는 장사라고 거짓을 말하면서도 그것이 축재를 위해서는 당연한 수단으로 생각하는 상인들, 그들의 얼굴에서는 돈을 위한 부질없는 희생이 엿보인다. 사람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돈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 그들 틈에서 오늘도 비록 조금이지만 정직(正直)한 대가에 만족하는 사람들의 자족하는 얼굴들이 또 묻힌다.

학문의 도를 닦는 사람들, 최근에 보여 진 학문하는 사람들의 비굴함을 보았는가? 온갖 짜깁기에 능통한 박사님들, 우리 것이라고 하는 것보다 온갖 외국 것으로 지배된 학문의 풍토, 거기에 취업과 생존을 위해서 그런 스승 밑에서 몸부림치는 학생들의 모습. 밤새워 켜진 도서관의 불은 무엇을 보고 있을까? 그래서인가! 한 달에 책 한권 사보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는 통계를 접하고, 기껏 베스트셀러라고 하는 책들은 얄팍한 상술에 걸려든 출세가도의 내용이 전부다. 허황된 환타지 소설은 현실도피와 대리만족용이었을까? 골방에서 주린 배를 움켜쥐고 연구하고 저작하는 사람들의 꿈은 무엇일까? 음지에서 양지를 비판하면서도 여전히 그곳을 지향하는 저작(著作)과 연구(硏究)를 하고 있을까?

시대정신을 바른길로 인도해야 할 사람들, 이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잘못 걸어온 지난날이 올무가 되어서 왜곡된 길을 가야하는 모습을 보니 가슴이 아프다.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면 새것을 담을 수 없을 터인데, 오히려 전철(前轍)을 그대로 밟고 있다. 시대의 아픔을 외면하는 종교의 존재이유가 또 있을까? 선배들의 희생을 통해 얻어진 면류관만 바라며 이 시대에 져야할 십자가를 외면하는 모습은 여전히 자기욕심에 눈멀어 바른 도를 행하지 못하는 사람들처럼 보인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묵묵히 약자들을 돕고 바른 외침을 세상에 내어놓고, 또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희생이 그립다.

최근 타계한 세계적인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씨는 이미 알고 있었을까? 전선과 비디오와 모니터 등 온갖 쓰레기 같은 재료를 모아 작품을 만들어서 그가 보여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연예인들의 신변잡기에 온갖 희한한 일과 비정상적인 일들이 가십거리가 되어 쓰레기 같은 내용과 정보가 판을 치는 방송과 매스미디어와 인터넷, 그리고 언론, 또 예술계의 적나라한 모습들을 비판하고 싶지 않았나 짐작해 본다. 그래서 그는 "예술은 사기다"라는 말도 서슴지 않았을 것이다. 마지막까지도 그런 탄식과 희생의 몸부림이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에 찍혀서 보여진 부은 얼굴 속에 묻힌 그의 눈에서 읽혀진다.

진정으로 탄식하며 희생하는 느헤미야와 같은 사람을 만나고 싶다. 권력에 눈먼 정계의 흐린 눈, 돈 벌기에 벌개 진 재계의 눈, 기웃거리다 사시가 된 학계의 눈, 가식에 엉큼하게 된 종교계의 눈, 그런 눈 말고, 사회와 시대 그리고 민족의 아픔 앞에 눈물로 점철되어 아낌없는 자기희생에 번득이는 그런 눈을 가진 사람을 만나고 싶다면 욕심일까?
 
입력 : 2006년 02월 0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