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비가 내린다
가을비가 내린다
  • 한관호
  • 승인 2008.10.23 09:44
  • 호수 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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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오랜 만에 내리는 비, 하지만 몇 방울 떨어지다 말다를 반복 하니 가뭄에 타는 들판을 제대로 적시기는 어려울 것 같다. 쌀 직불금 파문으로 쩍쩍 갈리진 농민들 가슴팍을 위로하기에는 턱도 없을 것이다.
군대 3년을 제외하곤 나이 50인 지금까지 논바닥에 코 박고 살아온 친구, 이영주는 천상 농사꾼이다. 70년대 후반, 모두들 도시로 도시로만 떠날 때 농사꾼이 꿈인 그는 진주농업전문대학에 진학했다. 고등학교 동기생 3명이 같은 대학을 진학했지만 그들은 전공과는 무관하게 도시에 직장을 잡았고 그는 남해로 돌아와 농사를 짓고 있다. 

그런 그가 운다.
대낮에 소주잔을 기울이다 울화가 치밀어 미치겠다며 전화통을 잡고 흐느낀다. 그깟 농업직불금 몇 푼 때문이 아니란다. 세상이, 사람이 싫단다.  
 
그가 말했다.
세상에는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있다. 그런데 있는 놈이 더 한다더니 이건 해도 해도 너무 한다. 이명박 정부가 내각을 구성할 때 강부자니 뭐니 할 때도 ‘능력 있어 잘사는 걸 시비 할 수는 없는 것 아니냐’ 고 생각했다. 평생 농사만 지어 자식들 책가방 3개, 넉넉히 채워주지 못해도 다 내 탓이라고 생각했다. 도시로 나간 이들이 명절이면 자가용을 몰고 씽씽 달려와 왜 이 고생하며 사느냐고 안타까운 눈길 주어도 속으로는 전쟁통 같은 도시 사는 니가 더 불쌍타 생각했다.

모를 심어 놓고 이슬 털며 들판으로 나가보라. 하루 하루 쑥 쑥 자라는 벼만 봐도 배가 불렀다. 아침, 저녁 살뜰히 눈길 주다보면 어느새, 제 힘에도 겨운 알알이 영근 나락들을 달고 있다. 그게 희망이었다. 그런데 이젠 희망이 보이지 않는단다. 뭐 먹을 게 있다고 자신과 같은 벼룩이들 간을 빼 먹는 부자들만의 세상이 돼 가느냐고 한다.

직불금 사태에 분을 못 이긴 농민들이 쌀값을 올려야 한다며 들판을 갈아엎자 한나라당 국회의원이 한다는 말이 고작 ‘배후를 발본색원 하라’이다.
한나라당 박희태 대표는 사퇴한 이봉화 보건가족부 차관의 쌀직불금 부당 신청과 관련해 ‘300평당 50만원이 나가는 데 크게 이득을 노리고 했다는 생각은 안든다’고 옹호했다. 집권여당의 시각이 이러 할진데, 이 시대, 절망하고 좌절하는 이들이 어디 농사꾼 이영주 뿐이랴. 

국민 여론이 들끓자 어쩔 수 없이 쌀 직불금 청문회가 열린다. 그러니 공무원, 공기업 임직원, 의사와 변호사, 언론인 등 먹고 살만한 이들 중 누가 농민들 등골을 파먹었는지 밝혀질 것이다. 또 한동안은 제도 정비를 한답시고 설레발도 칠 것이다. 허니 다른 이야기를 해보자.
부자의 모범 하면 널리 알려진 경주 최 부자. 최 부자네는 인근 백리 안에는 밥을 굶는 사람이 없게 하고 한 해에 천석 이상은 소출을 못하게 하는 미덕을 보였다. 이런 부자는 또 있었다.   
전남 구례군 오미리에 있는 운조루, 풍수로 보면 우리나라 3대 명당 터 중에 하나다. 이름처럼 ‘구름 속의 새처럼 숨어있는 집’이라는 99칸의 아름다운 고택이다.

그러나 운조루가 진짜 아름다운 건 ‘쌀 뒤주’에 담긴 주인의 마음씨다. 둥근 통나무 속을 파내 만든 뒤주에는 작은 구멍을 막은 마개가 있고 그 위에 ‘타인능해(他人能解)’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누구나 이 마개를 열 수 있다는, 주인이 가난한 이웃을 위해 쌀을 내 놓은 뒤주이다.
더구나 쌀을 직접 나누어 주지 않고 이웃 스스로 가져가게 한 것은 쌀을 필요로 하는 이가 주인과 얼굴을 마주치지 않게 한 배려이다. 게다가 매달 그믐날마다 쌀뒤주가 비지 않으면 며느리를 불러 호통을 치며 가족들이 나눔에 인색하지 않도록 경계했다. 또 운조루 부엌 굴뚝은 높이가 겨우 1m 남짓하다. 굴뚝이 높아야 연기가 잘 빠진 다는 건 상식, 하지만 밥 짓는 연기를 보고 허기진 이웃들이 마음 아플까봐 일부러 굴뚝을 낮게 만들었다고 한다. 

작금의 쌀 직불금 논란은 직불금 금액 자체가 본질이 아니다. 8년간 직접 농사를 지으면 면제해 주는 토지 양도세가 문제다. 도시 사는 부자들이 투기 목적으로 여윳돈 투자해 논을 산다. 그리고 현지 농민들에게 논을 빌려주고 소작료를 받는다. 게다가 농사를 직접 짓지 않으면서도 쌀 직불금까지 자기가 챙긴다. 땅을 팔 때는 세금도 한 푼 안 낸다. 그야말로 꿩 먹고 알도 먹고 이다.  

가을 햇볕에 소 등짝 벗겨진다고 했다. 하지만, 유난히 농민들 등골만 태우는 이 가을, 부자들에게 공직자들에게 경주 최부자, 구례 유부자네 그 최소한의 미덕을 기대하는 것조차 욕심일까. 탐욕의 끝이 보이지 않는 이 시대, 비라도 흠뻑 내려야 할 터인데 병아리 눈물처럼 찔끔거리기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