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기부문화
한국의 기부문화
  • 한관호
  • 승인 2008.11.27 08:52
  • 호수 28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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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저녁 무렵, 현관 초인종이 울렸다.
아내가 문을 열자 “우리 애 돌”이라며 새댁이 떡 한 접시를 내밀었다. 돌떡은 그냥 받는 게 아니라며 아이에게 양말 한 켤레 사 주라고 5천원을 내미는 아내, 손사래 치는 새댁. 그날, 한빛그린아파트 101호 새댁은 아파트 양쪽 복도 12층 계단을 오르락내리락 하며 48세대 모두에 돌떡을 돌렸다. 떡을 먹으며 돌을 맞은 아이가 건강하게 무럭무럭 자라기를 빌었다. 
 
지난 주 토요일, 집에 들어서니 현간에 쌀 한 자루가 놓여 있었다. 아들 녀석이 “아버지 아는 사람이라며 쌀을 부려 놓고 갔다”고 한다. 퍼뜩 떠 오른 얼굴, 읍 중촌마을 박근배 이장이다. 쌀독이 그득하니 부자가 별거이랴 싶으며 쌀독처럼 넉넉해진 마음이다. 과일 집에 전화를 걸어 이장 댁에 과일 배달을 부탁하고 그에게도 감사함을 전했다. 

기실, 그는 나와 먼 친척이다. 굳이 설명하자면 돌아가신 그의 할머니가 필자의 큰 고모님이다. 그는  해마다 이맘때면 수년째 쌀을 가져다 놓는다. 봄이면 마늘 한 망사를 가져온다. 아마도 남해 토박이지만 땅 한 평 없는 필자가 안쓰러웠던 게다. 하지만 평생을 농투산이로 살아 온 그인지라 제 가족 건사하기도 여간 버거운 게 아닐 터. 그러니 어디 선 듯 쌀 말 퍼내 남 주는 게 예사 마음인가. 가슴이 먹먹해졌다.
남해에는 재미있는 설화가 있다.

도시에서 전근 오는 공무원들이 나룻배를 타고 노량해협을 건너 남해로 들어서면 적막한 섬에서 어찌 살까 싶어 운다고 한다. 그러나 임기를 마치고 도시로 떠날 때도 운다. 인정머리 많은 남해사람들과 헤어지는 게 아쉬워, 그렇게 두 번 운다고 했다. 하지만 그도 옛말이다. 갈수록 각박하기 이를 데 없다. 필자가 사는 작은 아파트만 해도 그렇다. 오다가다 만나면 인사들은 나누지만 제 집 문 닫고 들어서면 단절되는 공동체다. 우리 자신도 모르게 아파트 벽처럼 단단한 경계들이 생긴 세상이다. 
그러고 보니 제삿밥 먹어 본지가 언제인가. 예전엔 동네에 제사가 들면 마을 사람들을 제 불러 모아 비빔밥 한 그릇씩을 나눴다. 못 온 식구들 주라고 떡 한 조각이라도 들려 보냈다. 새로 집을 지은 이는 동네 사람들 모셔다 돼지고기 넉넉히 삶고 막걸리 잔 철철 넘치게 돌렸다. 더러, 아이들이 수박이며 참외를 서리하다 들켜도 지금처럼 경찰서까지 가는 일은 없었다. 가난하고 배고팠던 시절이었으나 사람들이 사람 냄새 나는 따뜻한 시절이었다. 

문근영, 흔히 국민 여동생으로 불리는 배우가 연일 곤욕을 치루고 있다. 그것도 추문이 아니라 이 각박한 세상에 온정을 나눈 사실이 알려지고 부터다.
그는 지난 몇 년간 한 이웃돕기 자선단체에 8억여원을 기부했다. 그는 이 사실을 숨겨왔으나 어느 언론사의 끈질긴 취재로 거액의 기부자가 그라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졌다. 적어도, 상식이 있는 사회라면 이제 스물이 갓 넘은 그의 마음 씀씀이에 박수를 보냈을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을 들여다보게 되고 자선냄비에 천 원 한 장이라도 보탤 것이다.

그러련만, 어찌된 게 한국 사회는 그를 마녀 사냥했다. 군사 평론가란 어떤 작자가 이미 돌아가신 그의 외할아버지를 부관참시하고 빨갱이 집안으로 매도했다. 나아가 ‘문근영 기부행위의 배후에는 좌익세력이 존재하며 이들 좌익 세력은 호남에 대한 호의적 정서를 이끌어 내려는 심리전을 펴고 있다’며 음모론, 색깔론에 지역감정까지 부추겼다.

후배들과 술잔을 기울이다 문근영 이야기가 화제에 올랐다. 학생 운동을 하다 3년간 옥살이를 했던 후배, 아들 하나가 있는데 중 1 생일 선물로 탤런트 김혜자씨가 쓴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는 책을 사주었단다. 헌데 책을 읽고 난 아들이 자기 용돈에서 ‘아프리카 기아 어린이돕기’에 한 구좌를 들더란다. 고등학생인 지금도 그 구좌를 이어가고 있어 기특하게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문근영 꼴 아니냐고 했다.    

그에게 국민들은 이번 논란에 대해 ‘나이 어린 기부자에 비해 나이 값도 못하는 평론가’란 여론이다. 더구나 문근영의 선행이 알려지면서 그 단체에는 기부 희망자가 늘고 있다니 위안하자고 했다. 
연말이다. 하지만 새해가 기다려지는 희망의 연말이 아니다. 내년 경제성장률이 최악일 것이란 보도로 벌써부터 마음까지 추워지는 한 해의 끝자락이다. 그러니 이맘때면 어김없이 열리는 이웃돕기 창구도 예년만 못 할 게다.
이런 시절이면 영락없이 생각나는 시 한편이 있다.
‘너에게 묻는다’,
                                  안도현.
연탄재, 함부로 차지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따뜻한 사람이었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