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현월이 늘 푸르렀으면..."
"고향 현월이 늘 푸르렀으면..."
  • 광양신문
  • 승인 2006.09.14 14:27
  • 호수 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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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춘 엽 주부 / 서울시 강남구 거주
내 고향 광양읍 현월은 광양만에 위치해 있기에 늘 해풍과 비릿한 뻘 냄새가 물씬나던 곳이다.

현월리 앞 강 건너 모래 속에는 갱조개가 지천으로 널려 있었고, 방천 밑 뻘밭에는 찔럭게가 연신 게 구멍을 드나들던 곳으로, 우리는 온몸에 뻘을 치대고 뻘 구덕을 미끄러지며 물이 들 때까지 게를 잡으며 지냈었다.

당시 우리는 흔치않던 소설책도 돌려보고 밀·보리를 베어 모닥불에 구어먹을 때면 얼굴 등에 시커먼 숯검장이 묻어 그 모습을 연상할 때면 흡사 인디언 같았다. 나는 어렸을 적 아버지께서 소먹이로 가실때 자주 따라 다니곤 했다.

그때는 현월 앞 강가에 돗단배가 드나들곤 했다. 멸치배, 갑 오징어배, 옹기배등이 기억이난다. 그 시절의 교통 수단이 소 달구지와 자전거가 전부였으니까…. 물 아래마을(초남리) 어민들이 고기발을 털면, 잡힌 고기들은 신선도를 유지하기 위해 버들잎 가지로 덮어서 마을로 이고 들어왔다.

파닥거리는 생선을 엄마 앞에서 조심스럽게 만져 보던 시절, 어머니는 그 생선을 보리나 쌀등을 주고 물물교환을 했다. 싱싱한 그 생물맛은 오늘날 느껴 보기가 힘들다.

주부인 나는 그시절 그 식탁이 웰빙(well-being) 식단이었다는 말을 자주한다.


당시 갱조개 한바구니를 삶아서 틉틉한 진국에 호박과 함께 국을 끓이면 어머니가 담근 칼칼한 고추장이 상에 같이 오른다. 우리 아버지는 갱조갯국에 꼭 그 고추장을 넣어서 잡수셨다.

지금도 아버지가 잡은 소 고삐를 잡고 다니던 때를 생각하면 눈앞이 흐려져 온다. 중년이 되어 더욱 부모님 생각이 나는 것은 왜일까? 아마도 내 자식들이 내곁을 떠날때가 돼서 인지도 모르겠다.

내추억 속의 고향이 변한것은 먹거리 뿐만 아니다. 동네 어른들의 삶의 문화도 그때와 많이 다르다. 불을 지펴 보리쌀 삶아 밥을 짓던 아궁이는 가스 오븐렌지나 전기 밥솥이 대신하고 들일을 할때 나눠먹던 새참은 읍내 음식점에서 배달을 하여 드신다고 한다.

횡하니 뚫린 도로는 고향을 찾을 때마다 자갈을 발길로 차면서 걷던 어린 시절의 추억을 낯설게 만든다.

'산천이 의구하다'는 옛 시인의 말이 무색함을 느끼며 내 고향 현월이 늘 푸르기를 기원할 뿐….
 

입력 : 2005년 04월 1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