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동래의 우리고장 문화탐방기 3. 진상면
조동래의 우리고장 문화탐방기 3. 진상면
  • 광양뉴스
  • 승인 2013.09.02 10:24
  • 호수 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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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불봉 정기 받은 호남의 ‘명당’… 유명 인사 다수 배출


위치와 지형

위치와 지형진상면은 광양읍에서 서북쪽 50리 떨어져 있으며 내륙에 속한다. 동쪽은 백운산 능선을 넘어 다압면과 접해있고 서쪽은 옥룡ㆍ옥곡면을 경계로 하고 있다. 남쪽은 진상천의 흐름을 형성해 수어천을 따라 섬진강하류와 만나 남해로 흘러가고 있으며 북쪽은 백운산 억불봉을 정점으로 깊은 어치계곡이 형성돼 백학동의 전설을 품고 있다.

옛 지형은 남북으로 길게 펼쳐있으며 근래 조성된 수어댐에서 흐르는 물은 섬거리와 창촌사이를 기점으로 흘러 넓은 늪지대가 형성되었다. 그 중심지대를 따라 샛강이 조성되어 바닷물이 강을 따라 금이리 까지 들어와 60여 년 전에 파시가 조성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때 수어천 양쪽에 제방을 쌓아 농토를 조성했으며 경지정리를 완성함으로써 비옥한 옥토를 얻게 된 지역이다. 수어천의 개발로 인해 농토가 조성되기 전에는 늪지대로 갈대밭이었고 개펄 층은 하천의 영양염류가 퇴적되면서 다양한 형태를 이루어 왔다.



이 지역은 빗물에 의한 퇴적층과 바닷물에 의한 미세한 입자의 토층이 형성되어 농사에 적합한 비옥한 토질로 형성되어 있는 곳이다. 지질은 내륙산간지역인 백운산과 지리산형의 편마복합체에 속하며 잘 발달된 식생의 피복으로 부식토가 발달되어 표피층의 색깔은 갈색으로 되어있다.

 


살기 좋은 곳으로 부상
조선말기 교통의 수단인 신작로가 광양지역의 중심부를 통과여 하동으로 가게 됨으로써 산업발달의 기반이 조성되었다. 또한 수어천을 중심으로 양편이 간척사업으로 옥토로 변함에 따라 생활이 풍족해지고 민심이 후덕해지니 양반과 선비가문이 출현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특출한 인물이 배출되어 국회의원이 4명이나 탄생되었다.

또한 충과 효를 바탕으로 한 애국정신과 향토를 지키고자하는 의협심이 강해 의사와 열사가 많이 태어난 고장이다. 섬거마을 뒤에 있는 애정봉ㆍ매봉ㆍ삼각봉이 병풍처럼 쌓여 있는 자락에 위치한 진상초등학교의 터가 풍수 지리학상 호남의 명당이라 인물 배출이 많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다.

어치계곡은 맑고 깨끗한 물, 시원한 공기는 삶의 활력소가 되어 어치폭포수 아래 송어양식을 하고 있으며 백운산의 정취와 섬진강에서 인수한 물과 합해져 수어 댐을 이루어 풍치를 더하고 있어 관광객과 등산애호가들이 봄부터 가을 까지 붐비고 있다.

인근에 숲의 쉼터가 있고 휴양시설이 갖추어진 민박은 단순이 잠을 자는 장소가 아닌 이벤트로 삶의 지혜와 활력을 충전시키는 수양지로 조성돼 있다. 또한 예부터 명성을 이어오고 있는 진상 곳감은 재배면적의 확대와 현대식 건조시설의 확충으로 수요에 공급을 충당하지 못할 정도로 판매가 잘돼 고소득을 얻고 있다. 매실, 감, 밤은 품질이 좋아 명성을 알고 찾는 소비자가 많아 맞춤형 거래로 통상이 원만하다.



발전하는 시대에 앞서가기 위해 경전선 철로를 직선화하면서 구역이던 진상·옥곡역을 합해 금이리 앞에 새로운 역을 만들어 재도약을 꿈꾸고 있다. 비옥한 토지를 안고 있는 농토에 최신식 원예 작물을 생산하는 면적이 25ha로 다양한 종류의 뿌리ㆍ줄기ㆍ옆채소가 대량으로 생산되고 있어 국내소비는 물론 수출에 역점을 두어 소득이 향상되어 가고 있다.   


유적과 유물
진상면 문화유적지는 창촌마을에서 구석기시대 후기 유물로 추정되는 사냥도구인 찍개가 발견됐다. 다만 여기서도 신석기 시대의 유적은 발견되지 않고 있으며 청동기시대 시체를 매장했던 지석묘가 섬거리 10기, 금이리 섬구장터 7기가 분포돼 있다.

기념물로는 비평리에 있는 기념물 제177호인 불암산성이 있으며 향토문화유산으로는 청암리 양복수 정려비가 등록돼 있다. 사적인 유래를 살펴보면 광양지역의 지명인 백제·고려·조선조·대한민국까지 흘러온 역사에 기록된 마로현-희양현-광양현-광양군-광양시로 변천되는 과정에서 큰 변화 없이 진상으로 표기되어 오고 있다.

특히 1760년 광양이 12면으로 개편된 때의 호구는 383호였고 인구는 남 661명, 여자는 781명이었다. 정조13년 최초로 문헌상 기록된 때에는 15개 마을이 있었고 관리는 農務官(면장)의 휘하에 里正ㆍ村正(村長)이 담당하고 있었다.

진상면 이름이 처음 사료에 나타난 문헌은 여지도서(1760년,하권)로 진상면 고을 이름과 당시 호구수와 인구수가 최초로 수록되어있다. 이름을 짓게 된 유래는 청암리(목과마을) 인근에 있던 ‘숭어소 나루터’가있었는데, 그 위쪽이라 하여 진상면(津上面, 上道面)이라 불렀다.

그리고 그 아래쪽에 있는 지역을 진하면(津下面)이라했고, 숭어소 나루터부근을‘효자문터’라 하는데 이곳에서 태어나 살고 있던 양복수란 분이 추운동짓달에 소에서 숭어를 잡아 부친의 묘상에 올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지자 조정에서 그분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정려를 세웠던 곳이다. 왜정시대(1914년) 행정개편 때 7개리(금리리, 섬거리, 비평리, 황죽리, 어치리, 지원리, 청안리)로 조성된 지역이다.

이 고장은 인물이 많은 곳으로 국회의원 6명(김옥주, 엄상섭, 황숙현, 김석주, 김선주, 김명규)은 물론 국가서열 일곱 번째인 국가정보원장을 배출한 곳이다. 나라를 지키는 의협심이 강해 의병의 발상지 이기도하다.

또한 1959년 진상중학교가 설립(황호일)되고 3년 후에 고등학교가 연이어 설립됨으로써 인근지역의 청소년들이 교육받을 기회가 마련되어 많은 인재가 양성되어 각 분야에서 중추적 역할을 함으로서 인재의 요람이란 말이 전해지는 곳이다.

근래에 수어천 댐공사로 비촌마을이 수몰되고 청암들이 간척되어 넓은 면적이 옥토로 변해 풍요로운 고장이 되었고 1983년 진월면 진정리 삼정리가 진상면 청암리로 편입되었다. 또한 1907년 황병학ㆍ황순모가 주축이 되어 조직한 의병 200여명이 청학동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역사의 고장이기도하다. 


명소가 있는 마을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 쉬는 마을을 찾아 유물과 유적을 찾아본다. 첫 관문인 이천마을은 1683년 진주 강씨가 처음 입촌하였고 저수지가 있으며 치수사적비 2기와 불망비 2기, 자혜비1기 등 모두 5기가 있고 영모재(永慕齋 남평문씨 재각)가 있다.

마을 이름은 행정구역을 통폐합할 때 금련촌과 이천의 첫머리 글자를 따서 금이리라 했다. 한때 배드리라고 불었는데, 해방 후까지 도서민들은 배로 여기까지 드나들며 이곳 섬거장을 이용했었다.

그리고 섬거마을은 진상초등학교 뒤편에 위치해 있고 2백여 호가 살고 있던 부촌이었으며 중심지역할을 했던 마을이다. 금녕김씨와 경주최씨 재각이 있다. 그리고 부락의 상징인 정자나무 수령 500년, 흉고 4.7m, 수고 17m의 고목과 당산제를 지내는 당산나무가 있다.

동학농민군과 가장골 광양군 영호대도소 대장인 김인배 등은 깃발을 높이들고 하동을 점령한 후 여세를 몰아 곤양을 거쳐 진주를 점령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에 밀려 서쪽으로 퇴각하면서 섬진강에서 3천여 명이 수장되었다고 전해진다.



잔여병사는 섬거역에 도착해 접전 끝에 지휘자 28명이 총살당하였으며 농민군의 시체를 가매장한 곳이 가장골이라 기록하고 있다. 또한 옛 섬거역은 섬거리 619번지 회관자리에 있으며 역리 94명 노비 5명과 역둔 답160두락이 주어졌다는 기록을 2007년에 석판에 음각하여 입구에 수립해 두고 있다.

신시마을은 진상면의 중심지로 면사무소ㆍ지구대ㆍ우체국ㆍ5일시장ㆍ초중고등학교ㆍ진상단위농협(1930년대 신축 건물)ㆍ향토예비군지대ㆍ보건지소ㆍ농민상담소ㆍ소방서 출장소ㆍ복지회관 등의 각급기관이 운집해 있는 마을이다. 신시라는 이름은 이천마을에 있었던 섬거장이 이곳으로 옮겨오면서 새로운 장터란 뜻으로 신시(新市)라 부르게 되었다.

문화유적으로는 진상중학교 사적비와 당산나무는 수령 약 300년이며 푸조나무이고 흉고 4.8m이다. 중앙에서 활동하는 인물이 많이 배출된 마을이다. 비촌(飛村)마을의 이름은 구황리에 있는 황룡사에 살던 황룡이 이곳에 날아와 앉았다는 유래에서 지어진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16세기 창원황씨가 처음 입촌하여 번성했으며, 사대부와 선비가 많은 명문 촌으로 명성이 자자했다. 또한 의병의 주도자인 황병학과ㆍ황순모도 이 마을 출신이다.

1974년 수어 땜 공사로 마을 전체가 이주해 마을이 이름처럼 날아가 버린 곳이기도 하다. 청계당(1788년 건립)이 있었으며 창고에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진사 답안지 외 여러 가지 문헌이 보관돼 있다.

청계는 성담선생이 황면기(1773~1824년, 진상중학교 건립자 황호일 6대조)에게 내려준 호이며 조선조 거유인 최익현은 행록에 그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비촌의 수몰로 신황마을로 이축했다.

운수장은 황룡등 아래에 있던 황병중의 독서 처이다. 이 마을 은 약 220년 전부터 덕석 굿이 있었는데, 옷감에 용을 그려 기를 만들어 대나무에 높이 달고 농악놀이를 했었다. 지금 백학동 표석은 용계마을 공실바구에 새겨졌던 백학동 표석은 수어댐 건설로 수몰되고 10년 전「백학동 사람들」모임에서 세운 것이다.

초입에 있는 불암산성은 광양시 4대 산성중 하나로 해발 232m이며 백제시대에 축조된 산성이며 전라남도 지정문화재로 등록돼 있다. 구황ㆍ신황마을은 황죽리 지역이며 구황에 있는 문화유산으로 영모재(永慕齋 재령이씨 덕명공파 재각)와 억불사·생쇠골 야철지는 억불봉 방향 골짜기를 타고 2.5Km 지점에 있으며 제철로 1기와 작업장 및 생활공간 등의 흔적이 남아있으며 의병들이 활용했다고 하나 기록이 없어 아쉽기만 하다.

또한 학림정(鶴林亭)과 마을 유래비가 있다. 신황 마을에 황룡사지는 여지도나 사서에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도선국사가 창건했다고 하나 기록이 없다. 또한 웅동에는 1904년 처음 예배를 시작한 교회의 발생지가 있으며 그를 기념하기 위해 새롭게 단장한 교회가 설립되어 있다.

용계마을 문화유산으로 차성진 자선비(1871년 건립한 차선공 선덕비)ㆍ은선암(1952년 박연엽이 세움)ㆍ무봉암(1952년 선만규와 그의 처 정서례가 세움)ㆍ운고정(1950년 경 황호일이 건립 후 죽림마을 로 이축함)ㆍ공새바구는 두 개의 바위 중 위쪽에 있던 바위에 백학동이란 글씨가 음각되어 있었으나 수몰되면서 사라졌다.

창촌마을의 유물로는 구석기시대 후기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석양암 자갈로 된 찍개로 당시의 사냥도구로 쓰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유적으로는 섬거창 터가 있으며 조선조 광양현감 정숙남(1577~1580, 최산두·박세후의 사당을 건립함)이 이곳에 섬거창을 설치하였다.

터는 창촌 1050번지 일대이며 근래 집을 지으면서 터 작업을 할 때 옛 창고 초석이 발견되었다고 부락민 안길성이 증언했다. 삼정마을의 위치는 진월면과 경계지역인 배암재 아래 강변에 자리하고 있으며 명칭에 약간 변동이 있었다. 호구총수에는 진하면 정자촌으로 되어 있으며 왕명으로 제작된 광양현 지도에는 진하면 삼정리로 표기되어 있다.

그리고 행정구역개편(1914년)으로 진하면과 월포면이 병합되면서 진목정리ㆍ삼정리ㆍ선동리ㆍ중산리가 합쳐 진정리지역에 속하면서 삼정리라 하였다. 그 후 대통령령 제 11027호에 의하여 진월면 진정리 삼정부락이 진상면 청암리에 편입돼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다.

문화유산으로는 숭모재(崇慕齋 천안김씨 재각). 밀양 박순갑 시혜비(마을 앞 제방축조 공사 때 사유지 주인 박순갑은 부지를 무상으로 희사해 1965년 주민들이 은혜에 보답코자 세운 비이며, 솟대는 70여 년 전에 세웠으며 매년 섣달그믐날 자정이 넘어동제를 지내고 있다. 여러 가지 여건으로 마을 모두를 탐방하지 못한 아쉬움을 접고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