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들 이름 쓰고 읽을 때가 가장 기뻐요
가족들 이름 쓰고 읽을 때가 가장 기뻐요
  • 광양신문
  • 승인 2006.10.18 18:59
  • 호수 18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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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강면 신촌마을 '한글교실'
"자 한명씩 읽어보세요? 세배, 참외, 가위, 성묘, 설..."

"이번에는 뒤부터 읽어보세요? 설, 묘성(?)...뒤부터 읽는다고 거꾸로 읽으면 어떡해요? 다시 읽어보세요" 교실안은 한바탕 웃음이 터졌다.

봉강면 신촌마을회관. 이곳에서는 일주일에 세차례 어른신들을 위한 '한글교실'이 열린다. 일반 학생이 아닌 평균 연령 70이 넘는 신촌마을 어른신들이다.

한글을 가르치는 선생님은 봉강면 조령보건소장인 김경자(45)씨. 그가 한글교실을 처음 연 것은 지난달 초부터다. "어머니들(그는 학생들을 어머니라 부른다)의 부탁이 있었어요. 어딜 가더라도 글을 모르니 오죽 답답하겠습니까? 수십년동안 그렇게 살아와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어요"

현재 한글을 배우고 있는 학생수는 11명. 이들은 월·화·목요일 저녁 7시를 애타게 기다린다. '한글교실'은 젊은 학생들도 소화하기 힘든 3시간 동안이나 수업을 한다. 그러나 지친 기색은 찾아볼 수 없다. "어르신들이 배우려고 하는 열의가 대단해요. 단합도 아주 잘 됩니다. 또박또박 한글자씩 써내려가는 것을 보면 마음이 훈훈해 집니다" 김소장은 행여 어르신들이 지루해 하지는 않을까봐 수업중간에는 함께 노래도 부르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그는 이곳에 20년 정도 살아서 어느 집에 무엇이 있는지부터 각 가정의 대소사도 훤히 알고 있다. 그래서 어머니라고 부르는 것도 무리가 없다. 행여 수업중에 아픈 어르신이 있으면 간단히 치료해주기도 한다. 어르신들은 김소장에 대해 "딸같은 선생님이 열성적으로 가르쳐 주고 이야기도 재밌게 해줘 시간가는 줄을 모른다"며 이구동성으로 김경자 소장을 칭찬했다.

처음에는 김소장이 사비를 털어서 교재와 필기구 등을 구입했었다. 그러나 나중에 신촌마을 노인회에서 그 사실을 알고 "가르쳐 주는 것만도 고마운데 그러면 안된다"고 정색을 하는 바람에 노인회에서 노트 및 필기구를 구입해주고 있다.

김소장은 어르신들이 외출할 때 간판에 들어오는 글을 한자 한자 읽어나갈 때 커다란 보람을 느낀다고 한다. "그동안 버스타면서도 아무것도 모르는 글자들을 볼때면 얼마나 답답했겠어요. 정류장에 무슨 글자가 써있는지 읽어내는 어른신들을 볼 때면 제가 더욱더 기쁩니다"

어르신들은 외출시 눈에 들어오는 한글과 숫자를 어느정도 이해할 수 있으나 아직 관공서에 들르는 것은 엄두도 못내고 있다. "여기 칠판에 글씨 쓰는 것도 부들부들 떨리는데 관공서는 아직 멀었어. 좀 더 배워야해" 어르신들은 한자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선생님의 강의에 열심히 귀를 기울였다.

김순임(76)할머니는 "평생 까막눈으로 살았는데 한글을 배우고 나서 간판이 눈에 들어오고 가족들의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며 함박 웃음을 지었다. 김할머니는 이어 "나이 때문에 자꾸만 들어도 잊어 버리는게 안타깝다"고 아쉬워했다.

김소장이 이렇게 한글교실을 운영할 수 있었던 것은 남편의 도움도 컸다. 처음에는 혼자 가르쳤으나 요즘에는 남편도 가끔씩 나와서 도와주고 있다고 한다. 어르신들은 남편 역시 재밌게 잘 가르쳐 줘서 매 시간이 즐겁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눈코뜰새 없이 일주일을 바쁘게 보내지만 결코 힘들지 않다고 겸손함을 보였다. 앞으로 꾸준히 한글교실을 운영해서 졸업생을 배출시킬 계획이라고 한다. 그리고 출석점검도 빠지지 않는다.

그는 "졸업식때 꼬박꼬박 출석한 어머니들께는 개근상을 줄 계획"이라며 수줍은 미소를 보였다. '다른 마을에서도 요청이 있으면 한글교실을 열어 볼 계획'이라는 김경자 소장의 얼굴에는 겸손과 웃음외에 어르신들에 대한 사랑이 가득 배어 있었다.
 
입력 : 2005년 02월 17일